위로가 직업이 될 수 있다면
'ㅋ'과 'ㅋ'사이, 띄어쓰기 하나만큼의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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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성적으로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해 준 사람이다. 내가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에 위로받은 것인지, 그녀가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어서 좋아했는지 사실 선후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거나, 그 온수같은 따뜻함이 좋아 그녀를 꽤 많이 좋아했다.
물론 그녀는 나에게만 따뜻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주말을 함께 보낼 때면 반나절에 두세 번은 아는 동생,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통은 '다음에 통화하자'라며 전화를 끊곤 했지만, 사실 전화한 이유를 들어보면 정말 별 게 아니었다. 그냥 심심해서 전화해 본 후배, 어떤 운동화를 살 지 고민하는 동기, 애인과의 가벼운 다툼 이후 고민상담을 빙자한 토로를 원하는 친구 등등.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또 듣기 위한 연락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천성이 리스너라고 했다. 그저 들어주는 것 만으로 사람들은 자기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나도 그녀에게 속 깊은 이야기,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 내가 말하고 싶었는지조차 몰랐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가끔은 괜히 얘기했나 싶은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후련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 마음을 이해하고, 필요한 위로를 처방해주는 그 능력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이별 후 전 남자 친구보다 전 남자 친구가 키우던 강아지가 더 그립다는 말이 있듯, 그녀가 유학을 가고 나서 한동안 그녀보다 그녀의 위로가 더 그리웠다. 사실 그녀가 했던 말은 시중의 약 삼만칠천 권의 자기 계발서의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나올법한 말이었다.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대를 하지 말아라, 내버려 두어라,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두면서 네 중심을 지켜라'와 같은 자존감에 대한 문장들. 하지만 그 문장 뒤에는 항상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어떤 고민으로 가득해도, 너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온점이 찍혀 있었다. 오글거리는 말도, 느끼한 눈빛도, 억지스러운 포옹도 없었는데, 명확하게 느꼈던 그 온점의 정체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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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번씩, 위로를 건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부장님에게 업무 코칭을 빙자한 인신공격을 당하고 온 후배, 거래처 담당자에게 갑을병정 무기경'신'정도의 대접을 받고 온 친구, 올해 떠난 강아지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난다는 엄마. 그때마다 나는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힘내'라고 응원을 해야 할까? '나도 그래'라고 위로를 해야 할까? 그녀는 어떻게 했던가, 어느 쪽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얼굴 근육을 움직여 '너의 슬픔에 공감해'라고 표현해야 하나, 활자로 전해야 하는 위로는 어떻게 해야 진심이 와닿을까? 듣는 이 없는 바보 같은 질문들만 던져본다. 고민의 결과는 참담하다. '나도 그래'로 시작해서 '힘내'로 끝나는 형편없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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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무표정한 얼굴로 카카오톡 대화창 한가운데 'ㅋ'을 30개 정도 치고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요즘엔 텍스트 대치 기능도 있어서 'ㅋ'하나를 누르면 30개가 한 번에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누군가 내 말에 'ㅋ'을 30개나 쳐서 보냈는데 사실은 그런 표정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면 왠지 서글픈 일이다.
위로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위로가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완벽하게 위로하고 싶다는 강박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위로가 고작 '무표정한 사람의 ㅋ 30개'처럼 가짜로 느껴질까 봐, 그래서 더욱 상처가 될까 봐 두려워한다. 울고 있는 이의 옆에 떨어져 주변을 서성인다. 그러면서 고작 '힘내, 잘 될 거야, (아니 요즘 버전으로)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따위의 형편없는 말들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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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란 상대방의 마음을 속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 괜찮다고 다독여주면, 가끔은 괜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울고 싶어 물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을 누군가 쳐다보아 주는 것 만으로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나약해진 내 모습이 싫고, 고작 그 눈빛 하나에 무너져버리는 것이 참 싫지만, 그저 그런 것들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마치 위로가 직업인 사람처럼, 쳐다보아 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던 그녀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속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상대방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나의 위로가 상대방에게 미칠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고, 실망하면 어떡하나 필요 이상으로 염려하다, 결국 아무도 속이지 못한다.
내가 온전히 그를 위해 슬퍼하는 것일까, '나에겐 그가 겪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혹은 내가 발톱만큼이라도 더 행복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털끝만치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입밖에 낼 수 없는 마음도 나약하지만 별 수 없는 내 마음인데, 적어도 그에게 위로를 건네려면 내 마음을 속이는 연습이라도 한 뒤에 해야 하는 게 도리이지 않을까, 위로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답은 내리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흐른다.
최근 여러 차례 병원을 들락날락거리며 검사를 받으며 힘들어하는 친한 친구에게 '힘들겠지만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차분하게 결과를 기다려보자..'라고 밖에 말하지 못했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다 괜찮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할걸 그랬나, 학술지를 찾아서 객관적인 사례를 보여줄 걸 그랬나, '차분히 기다려보자'라니.. 남 일처럼 생각하고 속 편하게 말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위로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마찬가지로 시간만이 야속하게 흐를 뿐이다.
이런 나라도 괜찮다며, 지구 반대편의 그녀는 나를 위로해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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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 어떤 예능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에는 'ㅋㅋㅋㅋㅋㅋ'라고 답장하는 대신, 'ㅋㅋㅋ ㅋㅋ ㅋ'라고 답장하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일명, 인싸들의 'ㅋ'(?)인 셈인데, 요는 'ㅋ'과'ㅋ' 사이에 있는 한 칸의 띄어쓰기, 공백이다.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성의 없이 'ㅋ'을 남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드러내고픈 마음 때문이지 않겠냐는 추측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무표정으로 치는 'ㅋ' 30개가 나만 느끼는 서운함은 아니었구나 싶어 왠지 위안이 되었다.
그녀의 위로는 마치 그 한 칸의 띄어쓰기 같았다. 사소한 배려는 띄어쓰기 한 칸에서 시작된다. 'ㅋ'과 'ㅋ'사이의 띄어쓰기가 나같은 사람의 답없는 고민때문에 만들어진건지, 그녀같은 사람의 본능적인 직감 덕분에 유행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떻게든 띄어쓰기 하나만큼의 위로, 그것을 발견할줄도, 건넬 줄도, 받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치 위로가 직업인 사람처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