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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May 26. 2020

타로점에 쓰는 만원을 아까워하는 어른이 되었지만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한산한 평일의 오후 한 시, 포항에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이건 그냥 버스가 아니라 무려 ‘프리미엄 우등버스’다. ‘한 번도 경험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경험해본 사람은 없다’는 명언이 조금 진부하다고 느껴질 무렵, ‘프리미엄 우등버스’가 내게 왔다. 진부하다니, 편협하고 오만한 인간이여. 다시금 저 명언을 만든 분의 시대정신과 통찰력에 동시 경의를 표했다.


거의 180도로 눕혀지는 리클라이머, 완벽한 은폐 엄폐가 가능한 1좌석 1 커튼 시스템, 비행기 앞좌석을 연상케 하는 LCD 화면, 게다가 무려 폰 미러링 기능까지. 사실 두어 번 이용해본 것이 전부이지만, 운전석 옆에 놓인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500ml 생수병을 능숙한 척 꺼내 들고 탑승하면, 비즈니스석 간접 체험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프리미엄 우등버스는 34,400원. 언젠가부터, 이만 원을 더 들여 시간을 사거나(KTX), 만 원을 더 들여 편리함(프리미엄 고속버스)을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적당한 지루함에 눈길이 자꾸 시계로 향할 무렵, 어느새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 백화점이야 뭐야’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그럴듯한 식당이라곤 카레전문점밖에 없어서 버스를 타면 카레 냄새가 진동을 했었는데. 온갖 체인 음식점과 카페가 즐비하다. 서울을 떠나 포항에 정착한 지 이제 만 4년째다. 느리고 여유롭게 흐르는 포항에서의 시간을 비웃듯, 서울의 시간은 착실하고 부지런히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빠른 유속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단디’ 챙겨야 한다. 안내판을 부표 삼아 동동 헤엄치듯 지하철역으로 향하여, 개찰구에 핸드폰을 갖다 댄다. 1,250원이 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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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시내를 편하게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아까부터 내 뒤를 덜덜거리며 따라오는 이 보라색 캐리어부터 처리해야 한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캐리어에 상처가 나는 것은 둘째 문제다. 걸음이 느린 나는 강남대로를 흘러가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거의 경보 선수처럼 걸어야 한다. 거기에다 캐리어까지 끌고 가는 것은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하나 얹는 것과 비슷한 부담이다. 물품보관함 가장 작은 함을 결제한다. 4시간에 2천 원. 가끔 훌쩍 초과하여 초과금액을 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또 돈을 주고 편리함을 구매한다.

어느덧 저녁 여섯 시. 친구 수영을 만난다. 늘 건버섯 사리를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안 시키고 후회하는 마라 전골집에 왔다. 이른 저녁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홍탕 전골과 고량주 하이볼, 그리고 건버섯 사리와 공깃밥을 추가 주문한다. 오늘은 ‘시간을 갖자는’ 헛소리를 하며 잠수를 타버린 수영의 남친을 흠씬 두들겨 패줘야 하는 일정이므로, 아주 흠씬 먹고 마셔야 한다. 기분 좋게 배가 불러오는 만큼, 그 X끼의 귀는 간지러웠을 저녁식사를 마친다. 4만 9천5백 원. 오늘은 내가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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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홉 시도 되지 않은 이른 저녁이다. 2차로 어디 가지 고민하던 내 눈에 ‘타로/사주/작명’ 간판이 들어온다. “수영아 우리 타로 보자!”, “그래!” 2초 만의 합의를 보고 깔끔한 내부가 인상적인 타로 가게로 들어선다. “와 우리 대학생 땐 막 포장마차 같은 데서 담요 3개씩 덮고, 발난로 앞에 두고 타로 보고 그랬는데..” 왕년 토크가 끝날 무렵, 상담을 마친 앞사람이 일어나고 우린 쪼르르 의자에 앉는다. “일반 타로 1.1만 원 / 심화 타로 2.2만 원 / 30분 상담 3.3만 원”

‘와 우리 대학생 땐 하나에 3천 원, 5천 원 이러지 않았냐?’ 눈빛을 교환하며 무언의 합의를 이루고 엉덩이를 일으켜 나가려고 했으나 “일반이랑 심화랑 뭐가 달라요?” 수영이 묻는 순간, 합의는 깨졌다. “일반은 그냥 일반적인거구~ 웬만하면 심화로 봐요 언니들~ 그래야 좀 더 자세한 상황을 디테일하게 봐줄 수 있어~ 원래 카드점이 그런 거라서 어쩔 수 없어~” 일반은 그냥 일반적인 거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래, 4천 원 하던 최저시급이 8천 원이 되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망설이는 친구 대신 내가 먼저 입을 뗀다. “저는 일반으로 볼게요, 잠시만요 현금이 있나..” 지갑에 있는 만원을 뒤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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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옮겨 와인 한 잔을 더 곁들이며 타로 결과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나니, 어느새 저녁 열 시. 만원을 더 들였다면 조금 더 확실한 미래를 알 수 있었을까? 돈으로 시간도 사고, 편리함도 사고, 기분도 사는데, 조금 더 확실한 미래를 사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타로 결과를 보며, 내가 기꺼이 구매한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제 불확실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이가 된 건가 싶어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든다.‘미신에 불과한 타로카드 따위에 2만 원이나 쓰는 바보는 아니야, 난 합리적인 어른이야’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5천 원으로 인생의 굴곡과 다이나믹함을 기가 막히게 맞춰주던 10년 전 대학로 1번 출구 앞 타로 포차를 생각한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5천 원으로 시작해서 2만 원을 내고 나오는 철없는 대학생이었다. 그때의 나는 일상이 호기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막막했지만, 늘 답을 구하려는 열정과 순수함이 반짝였던 것도 같은데. 나는 발걸음이 느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 때로부터 꽤 멀리 떠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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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 반. "수영아! 택시 타고 가자" 아까 못 쓴 만원을 괜히 이렇게라도 쓰고 싶어 수영을 꼬신다. 얼큰한 피로와 알싸한 술기운이 올라온다.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수영이 편히 울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준다. ‘그래, 만 원 더 쓰길 잘했다.’ 차창 밖으로 주황빛 가로등이 휙-휙 지나간다. 앞으로도 그렇게 시간은 흐를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어른이 되어갈지도 모르겠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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