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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Feb 15. 2022

엄마가 한쪽 이어폰만 끼는 이유

오늘도 나 그리고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잠을 청할 것이다

 누군가 인생 89일 차 아이와 사는 요즘이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한쪽 이어폰만 끼고 살아”라고 대답할 것이다.


 임신 후, 손에 꼽을 수 없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화장실 문제’였다. ‘태아가 커지면서 방광을 눌러 소변이 자주 마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곤 있었지만, 그 자주가 얼마나 자주인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아무도 ‘변기 레버를 내리는 동시에 쉬가 마려울 수 있다’고 얘기해주지 않은 거지? 보다 못한 남편이 ‘화장실에 이불 깔아줄까?’라고 말할 정도로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에 가야 하는 몇 달을 보낸 건 비단 나뿐만이 아 것이다.     


 임신 중기부터는 아무리 오래 자도 세 시간 이상을 한 번에 자기가 힘들었고, 사실 깨는 것보다 힘든 건 다시 잠드는 거였다. 실제로 방광이 가득 차서 요의를 느끼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볼 일을 보는 건 거의 5초 내외였다. 개미 오줌만큼 찔끔. 그런데 왜 그 짧은 시간에도 잠은 홀랑 깨버리는지. 잠이 깰까 봐 불을 켜지 않아도 보고, 손을 안 씻어도 봤지만,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다시 눕는 1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잠은 멀리 도망가버리곤 했다.      


 그때부터 잠자리에 이어폰을 두는 게 습관이 됐다. 억지로 눈을 감고 누워 있으면 밀려오는 걱정과 잡념들이 그나마 남아있던 잠을 홀라당 쫓아버리곤 했기에, 이어폰을 꽂은  대사를 거의 외우는 드라마나 영화를 재생했다. 생에 첫 임신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불편하고 낯설던 그 시절, 새벽의 여명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잡념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수면의 세계로 인도해주었던 건 몇 개의 자장 드라마와 이어폰 덕분이었다.     



 아이가 집에 온 날부터 거의 두 달은 이어폰이 필요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헐레벌떡(?) 잠이 들기 바빴기 때문이다. ‘신생아는 3시간에 한 번씩 밥을 먹는다’는 사실 또한 어렴풋이 알곤 있었지만, 신생아가 밥을 거의 1시간을 먹고, 트림을 30분을 시켜줘야 한다는 사실은 몰랐던 나였다. 먹이고 돌아서면 먹일 시간이었고, 틈틈이 그 사이에 나도 먹어줘야 했기 때문에, 졸음은 여름날 밥상 위를 맴맴 도는 파리처럼 하루 종일 내 주변을 맴돌았다. 이어폰은 언강생심, 아이를 배 위에 얹어놓고 인간 침대를 자처하면서라도 잠시 누리는 잠 한 숨이 간절했다.     


 그러다 다시 이어폰을 찾게 된 건 아이가 두 달 정도를 살면서 ‘똥 싸는 다마고치’에서 나름 먹고 놀고 자는(일명 먹놀잠) 패턴을 가진 ‘미니 인간’으로 진화하면서부터였다. 밤에는 10시간 정도 수유 없이 잠을 자기 시작했고, 8번의 수유는 5번으로 줄었으며, 낮잠 패턴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밥상머리를 맴도는 파리 같은 은은한 졸음과 피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24시간 대기하는 삶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삶의 질이 상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깊은 잠을 못 자고 자주 잠에서 깨곤 했다. 아이는 가끔 자다가 코끼리 같은 소리를 내서 내 잠을 깨웠고, 새벽 네 시쯤에는 얼마간의 토닥토닥이 필요할 정도로 울곤 했다. 그때마다 잠에서 깬 나는 신생아 시절만큼 미친 듯이 피곤하지는 않았기에 쉽사리 다시 잠에 들 수 없었고, 결국 다시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이어폰을 꺼내야 했다. 그러나 임신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이어폰을 한쪽만 끼고 잠드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새벽에 나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어야 했지만, 나도 살기 위해 일단 잠에는 들어야 했으므로,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고 한쪽 귀는 아이를 향해 열어두고 자게 된 것이다.     



 요즘 잠은 잘 자냐는 엄마의 질문에 “중간에 깨긴 하는데 이어폰 꽂으면 다시 잘 자긴 해. 근데 애 깰까 봐 한 쪽만 껴”라고 대답하자 엄마가 “아이고 우리 딸 엄마 다 됐네”라고 말했다. 엄마의 말대로, 엄마가 된다는 건 한쪽 이어폰만 끼고 산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할 때는 언제나 현실로부터 나를 고립시킬 수도 있고, 원하는 만큼 이어폰 속 소리에 빠져들 수 있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는 딱 절반만큼은 아이를 향해 나를 늘 비워둬야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 절반만큼의 빈 공간이 아이의 보챔과 울음으로 채워지는 날에는 나머지 절반의 내 몫이 유독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지곤 한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서럽게 우는 아이를 들쳐 메고 무릎 도가니가 나갈 때까지 둥가 둥가 아이를 달래다 보면 나만의 온전했던 하루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설렘 그 자체였던 ‘놀면 뭐하니’를 2달째 단 한 회도 못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특히 그랬다. 보채던 아이가 잠들자마자 이어폰 한쪽을 끼고 좋아하는 영상의 반복 재생 버튼을 누르며 잠을 청할 때, ‘언제쯤 예전처럼 이어폰 두 쪽을 모두 끼고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챔이 끝나고 다시 잠든 천사같이 아이의 얼굴을 볼 때, 밤잠에서 깬 아이의 얼굴이 어제보다 묘하게 조금 자라 있을 때,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에 초점이 생겨서 하루 종일 내 눈을 바라볼 때, 꼼지락거리기만 하던 손발을 허우적허우적 허공에 움직일 때, 제법 사람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무언가를 옹알옹알거릴 때, 나는 기꺼이 비워두었던 내 반 쪽의 세상이 형용할 수 없이 꽉 차는 걸 느낀다. 그 반쪽의 세상은 음악이나 드라마, 유튜브나 넷플릭스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아이는 자라고, 점점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은 목도 못 가누고, 앉지도 못하고, 스스로 식사는커녕 수면조차 해결하지 못하며, 생존을 위해 누워서 우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줄 알게 될 것이다. 고작 두 달 사이에 태어날 때 몸무게의 두 배가 훌쩍 넘어버리고, 손바닥 한 뼘만큼 키가 자랐듯이 말이다. 그날이 오면 예전처럼 이어폰을 양 쪽 귀에 모두 꽂고 잠들 수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아이를 향해 열어둔 내 세계의 절반을 쉽게 닫지는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육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의 독립이라고 했다. 즉, 언젠가는 아이를 품에서 떠나보내야 하고 다시 내 세상의 주인은 오롯이 내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이 찰나의 순간이 (몹시 힘들지만) 눈물 나게 애틋하다.


 영원히 아이가 전부인 삶을 살지 않을 테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을 단단히 차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일의 육아를 위해 오늘의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이어폰을 꽂지 않은 한쪽 귀는 너를 향해 열어두되, 나 그리고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잠을 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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