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래 Jan 26. 2024

어느 수영장 교정반 막내 이야기

행복이 직급순은 아니잖아요!


"안녕하세요! 재등록하려구요!"

"네, 이번달도 교정A반 맞으시죠?"

"네 맞아요"


 그렇다. 작년 6월에 수영을 시작한 나는 해가 바뀐 올해 2월까지도 교정A반이다. 첫 한 달을 제외하곤 계속 같은 반에 칩거 중인 이 반의(세미)고인물이자 터줏대감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수영장의 반은 '초급-중급-고급-교정-연수-마스터'로 나뉘기에, 교정반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오 수영을 잘하나 보네요!'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 수영장의 새벽 6시 반 구성은 '고급-교정A-교정-연수-마스터' 로 이루어져 있다. 태어나서 수영을 처음 해보는 사람도, 앞으로 갈 줄만 아는 사람도 일단 다짜고짜 고급반에 집어넣는다는 뜻이다. (팩트 : 새벽반은 수요가 많지 않아 초중고급을 통합 운영한다)


 주 5회 강습이지만, 지난 8개월 동안 강습에 매일 간 적은 (창피하지만) 단 한주도 없다. 변명과 핑계를 동시에 대자면,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주 2~3회는 아이를 등원해야 한다!'는 꽤 합리적인 변명이고, 두 번째는 주 1~2회는 전 날의 피로 혹은 과음(..ㅎ)으로 회복이 필요했다는 핑계다. (그런 날은 정시에 출근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8개월간의 평균을 내보자면 주 2회 정도 출석한 것 같고, 그 정도면 꽤나 꾸준히 운동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평균의 모순이 발생한다. 한가한 주간에는 주 4회를 가거나, 연말 등 바쁜 주간에는 15일을 안 가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꾸준히 운동을 하나요?'라는 질문에는 허겁지겁 변명과 핑계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이밀어야 한다. '아 그러니까 가긴 갔는데요...'



 그 덕분에 나는 지난 8개월간 꽤나 많은 동료 회원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수영장의 암묵적인 룰에 따라 뉴비(초보)는 맨 뒤에 서서 출발한다. 그리고 앞뒷사람과의 속도 차이를 고려하여 라인업 재조정(?)이 일어나는데, 타고난 운동신경도 없는 데다 결석까지 잦았던 처음에는 나는 중간에서 시작하여 결국 맨뒤까지 밀려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오히려 좋았다. 앞뒷사람 신경 쓰느라 무리해서 질주할 필요도 없었고, 내 페이스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매달 1일 신규회원들이 '이번달에 처음 오셨나 봐요!'라고 말할 때도 '아.. (잠깐의 망설임 후) 거의 처음이에요!'라고 대답하고 또 그분과 친해지면 그뿐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석을 하고 오랜만에 수업에 나가면, 신규회원들은 이미 한참 앞순번에서 옹기종기 모여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지만, 그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몇 달째 교정 A반에 머무르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고, 너무도 하찮게 느껴졌다. 그날은 승진자 발표 날이었다.




 승진자 발표날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심란했다. 동기들은 애진작에 (그러니까 2~3년 전) 과장이 된 지 오래였고, 나는 긴 휴직으로 인해 승진이 두 번 누락된 상태에서 한 해의 절반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새로운 부서에 복직을 했다. 부서 내 승진 대상자는 정해져 있고, 승진 쿼터 또한 정해져 있었으므로, 사실상 마음을 내려놓은 지는 꽤 되었다.


  '괜찮아. 그토록 원하던 교육부서에서 근무하는 게 어디야. 좋은 동료들과 웃으며 근무하는 게 어디야. 집과 회사와 어린이집이 각각 10분 거리인 곳에서 근무하는 게 어디야. 이전처럼 숨 쉬듯 야근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야. 여기서 승진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야' 그렇게 자위하며 안분지족 하려 애썼다.


그러나 사람은 원래 욕심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막상 게시에서 확인한 승진자 명단에 내 이름이 '정말' 없었을 때, 나아가 한참 후배의 이름들이 적지 않게 눈에 들어왔을 때, 심장이 얼굴에서 뛰는 듯 두 볼이 웅웅거렸다.


  수차례 시뮬레이션하고 연습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친 이별의 순간에 '그냥 안 헤어지면 안 돼?'하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렸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냥 나 승진시켜 주면 안 돼?' 우스운 꼴로 누구에게든 매달리고 싶었다. 마우스 휠 소리만 도로록 도로록 가득한 조용한 사무실, 나는 상기된 볼을 감추려 두 손을 얼굴에 한참이나 대고 있어야 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승진해 봤자 빨리 잘려~"

"괜찮아 언젠간 해! 과장승진 안 시켜주는 회사는 없더라~"

"직책 먼저 다는 게 중요하지 대리과장은 의미 없어~ 어차피 똑같은 노예야"


  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주변 사람들은 나를 위로했다. 고마운 한편으론, 삐쭉거리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먼저 과장이 된 후배들이 아직도 대리인 내게 예의를 갖춰준답시고 '선배님'이라고 불렀을 때의 기분을 당신이 아시냐고요!'



 내가 워킹맘이어서 승진에 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부서에서 승진한 사람 중 한 명도 워킹맘이다.) 승진자 선발 결과에도 이견이 없다. 가시적 성과든 보이지 않는 노력이든 인사평가는 상대적인 평가이므로 나는 납득했다.


 그러나 쉼 없이 바쁘게 살았음에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게 없는 듯한 기분을 겪어야 하는 오늘 같은 날, 꽤 우울하고 쓸쓸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서 쓸모 있는 직원인 동시에 아이에게 최고의 엄마가 될 순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했다. 그러나 이렇듯 회사에서 뒤처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날, 혹은 급한 일을 마치고 헐레벌떡 달려간 어린이집 신발장에 내 아이 신발만 덩그러니 있는 날, 풍선바람처럼 새어 나오는 한숨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수영장에서도 똑같네' 8개월째 교정A반 꼴찌라는 걸 문득 깨달은 것도 그날이었다. 하다못해 수영도 제대로 못 해서, 몇 개월 째 제자리에서 팔다리만 허우적거리고 있다니. 문득 허탈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니, 8개월째 교정A반 꼴찌인 건 괜찮고, 6년째 대리인 건 안 괜찮을 이유는 또 뭔가 싶었다. 왜냐하면 승진자 발표날 전까지는 내가 8개월째 같은 반이라는 사실도, 심지어 매달 꼴찌어서 뉴비들을 내 앞으로 떠나보내야 했다는 사실도, 아무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자리에서 내 페이스로, 내 체력과 여건에 맞게 그래도 8개월째 (강제) 미라클 모닝 및 새벽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대단한 거 아닌가? 한 번도 제대로 못 하던 접영으로 한 바퀴를 돌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봐! 안되던 접영도 '사람 살려' 자세로 한 바퀴는 돌잖아!'



 항상 '출근해야 해서요~'라고 말하며 수업 마치기 10분쯤 전 나가는 여자분이 있었다. 회사를 다니겠거니 짐작했었는데, 요 며칠은 50분까지 풀로 수업을 채우길래 슬쩍 여쭤보았다. "요즘은 일찍 안 나가시네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아 방학이라 애들이 늦게까지 자서요!" 알고 보니 그는 그동안 초등학생 아이를 깨우고, 등교 준비를 하러 집으로 출근하는 것이었다.


 놓고 간 짐을 찾으러 퇴근 후 수영장에 들렀을 때, 우연히 같은 반 다른 여자분을 만난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과 함께였다. "아이들이 오후 수영특강을 들어서요!" "와 그럼 하루에 수영장에 두 번 오시는 거예요?" 수영모자를 벗고 정돈된 머리(?)로 인사하는 게 어색했는지 그는 머리를 만지며 샐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어쩌다 보니 이 나이에 수영장 죽순이가 되었네요"


 각자 챙겨야 할 일과 아이가 있음에도, 최소 5시 30분에는 일어나서 몸을 일으켜 수영장으로 향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과 그저 꽤 긴 시간 동안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잃어버린 자아효능감을 조금은 채울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교정반이든, 연수반이든 무슨 상관인가. 지금까지 그랬듯 '내가 수영을 잘하는지 못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며, 앞으로도 딱히 문제가 될 소지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일전에 정재영 배우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제가 삭발한 게 무슨 연예계 이슈가 되겠어요. 우리 집에서나 좀 이슈 됐어요. 비호감이라고"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교정반 간들, 수영계에 이슈가 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고, 심폐구력을 높이고, 건강한 몸과 마음의 근육을 만들고, 그 힘으로 일상을 살아내고, 그것이 수영을 하는 이유이자 목적 아니겠는가.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으쌰으쌰 하며 말이다.



 내가 대리든, 과장이든 우리집에서나 좀 이슈가 되지, 엄밀히 생각해보면 전혀 문제되지 않을 문제였다. 후배과장들에게 '선배님' 소리 듣는 게 조금 머쓱하긴 해도, 그것도 그저 그 말을 듣는 순간일 뿐이었다. 승진자 발표가 나고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오랜만에 통화를 하게 된 (살짝 눈치 없는) 업무 파트너가 말했다 "서운한 얘기지만, 승진 안 돼서 어떡해요. 힘내요!" 서운할 얘기를 왜 하나 싶었지만, 어쨌든 위로를 가장한 해맑은 공격에 나는 "그러게요, 이러다 대리로 정년퇴직 할 것 같아요. 언제 위로주나 한 잔 사주세요"라고 말했다. 자조적으로 튀어나온 농담이었지만 말하면서,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리로 정년퇴직.. 좋은데..?


 나는 아직도 평영으로 수영하는 것보다 걸어가는 게 빠를 것 같고, 수영을 하고 있는 건지 살려달라고 구조요청을 하는 건지 헷갈릴 만큼 엉성하고 우스운 폼으로 접영을 한다. 그럼에도 수영이 좋았던 이유는 하나였던 것 같다. '내가 수영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뭐'. 그런  마음은 여기저기 여러모로 도움이 되어주었다. '내가 오은영 선생님처럼 육아천재가 될 것도 아닌데 뭐'. 디스인지 위로인지 모를 업무 파트너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내가 임원이 될 것도 아닌데 뭐'.   



 

 워킹맘이 되고 처음 마주한 세상은 '비교하고,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 세상에서 나는 소진되지 않을 만큼의 체력과 멘털을 분배하는 스킬이 생겼고, 나아가 약간의 뻔뻔함도 생겼다. 엄마는 습관적으로 '원래 애엄마가 되면 뻔뻔해지는 거야'라고 말하곤 했고, 과거의 나는 그 말에 반감을 가졌었다.


"그래서 지하철에 가방 던지고 뛰어가는 거야?"

"그건 다리 아파서 그런 거지, 너도 애 둘 낳고 나이 오십 돼 봐! 체면이 중헌가? 내가 살아야지"


 그리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뻔뻔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그런 태도로 삶에 임해야 모든 것을 아주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해내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거구나. (물론 다른 사람을 밀치면서 가방을 던져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수영장에서 어느 날 스트로크가 유독 잘 될 때, 앞사람과의 간격이 조금 좁아진 게 느껴 때, 한 번밖에 못 하던 접영을 두번 정도 더 하게 됐을 때, 오리발을 낀 채 가르는 물살이 유독 부드럽게 느껴질 때, 나는 물로 일렁이는 바닥을 보며 혼자 씩 웃곤 했고, 앞으로도 그저 그런 순간들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수영장 안에서든, 수영장 밖에서든 결국 남는 순간은 그런 순간들일 것이다. 


 아이의 눈부신 성장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음이 감사하다고 느껴질 때, 느리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내 커리어패스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 때, 일과 가정과 개인적인 삶에서 조금씩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밸런스를 잡아갈 때, 그럴 때 삶에서 진정한 가치를 느끼고 의미를 찾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근육은 열심히 움직여야 생기지만, 또 어떤 근육은 만들어지기 위해 반드시 버티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나는 꼴찌여도 괜찮은 꼴찌로서, 크고 작은 성취와 만족의 순간들을 즐기며,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는 교정A반에서의 시간을, 그리고 대리로서의 시간을 버텨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출석과 출근은 열심히 할 것이다) FIN.

매거진의 이전글 수영장 수강신청, 그게 대체 뭐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