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비행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 Dec 19. 2020

야, 너두 할 수 있어

그녀들을 처음 만난 날  



승무원을 준비하던 시절, 나는 아무 용건도 없이 공항에 자주 갔다. 김포공항, 어떤 날은 멀리 인천공항까지 가서 도착층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비행을 마치고 나오는 승무원들을 구경했다. 어떤 사람들이 승무원이 되는지 궁금했던 승준생의 일종의 현장학습이었다.



대개는 이랬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승무원 무리가 앞장서서 나오면 그 뒤로 30대쯤 되어 보이는 승무원들, 마지막으로 가장 앳돼 보이는 승무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사무장급으로 보이는 승무원들의 어깨와 보폭은 뭔가 당당했다. 승무원들의 표정이 밝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퇴근시간 승무원의 표정이 그날 비행에 달려있다는 건 승무원이 된 후 안 사실이다.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어린 병아리 승무원들을 살피며 '나도 저 틈에 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부푼 꿈을 꿨더랬다.



그리고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들어간 입사 교육. 일반 대기업의 평균 입사 교육 기간은 몇 주, 길어도 한 두 달 안에 끝난다. 반면 항공사 승무원 교육은 아주 길다. 일반 입사 교육이 약 1달, 객실승무원 전문교육(안전교육과 서비스 교육)만 2달 반이다. 도합 3달 반. 교육이 끝나면 실습비행, 종합 평가를 거쳐 정식 승무원으로 비행하게 된다. 안전요원의 자질을 테스트하는 과정인 만큼 평가는 아주 타이트하다. 안타깝지만 교육에서 탈락해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교육을 함께한 나의 동기들은 50명. 긴 시간을 함께했으니 다른 직군에 비해 동기애가 남다를 수밖에.



사설이 길었지만 이 글은 나에게 진한 인상을 안겨준 동기들에 대한 이야기다.



동기 1. A양


A양은 나와 최종면접을 함께 했다. A양은 1번, 나는 2번. 영어로 자기소개를 해달라는 면접관의 요청에 첫 순서부터 완벽한 R, L, th 기타 등등 발음으로 나머지 지원자들의 기를 확 죽여놓으셨다. 자기소개 내용을 들어보니 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자세히 언급할 순 없지만 스펙도 화려했다. 평생을 외국에서 살았으니 외국인 손님 응대는 문제없어 보였다.



A양의 어피어런스는 샵에서 받은 것 같지 않고 다소 엉성한 면이 있었는데, 물어보니 스스로 하고 왔단다. 행여 잔머리 하나 때문에 탈락할까 이 샵 저 샵 전전했던 나와는 상반된 강단 있는 면모가 인상적이었달까. 나에게 A양은 항상 다부지고 강인한 승무원상이었다. 면접관의 안목이 옳았다. 그녀는 입사 후 좋은 평가를 받아 신입승무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수강생들에게 헤어, 메이크업, 손톱, 증명사진에 들일 돈을 아껴 영어공부를 하라고 조언하는 강사가 되었다.



동기 2. B양


그녀는 예뻤다. 끼깔나게 예뻤다. 나는 항상 수강생들에게 '승무원은 연예인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다. 나를 봐서 알지 않느냐.'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했다. 승무원은 엄청나게 예뻐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이미지 세탁에만 전념하는 수강생들이 안타까워했던 말이자, 순도 100% 진실이다. 정말 연예인처럼 예쁜 승무원은 드물다. 하지만 공식에도 예외는 있듯 B양이 딱 그 예외였다. 수지, 한지민, 소이현을 오묘하게 섞어놓은 이미지였으니 말이다.



너무 예뻤던 나머지 처음 그녀를 본 나는 한 동안 멍하니 뚫어져라 B양의 얼굴을 쳐다봤었다. 그녀는 부산 출신. 부산지역에서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표준어가 서툴렀는데 그 마저도 예뻤다. 실제로 부산지역 면접에서 합격한 동기들이 꽤 있었고 그 친구들 대부분이 사투리를 썼다. 그런데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교스럽고 예뻤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 때문에 고민하는 수강생들에게 크게 개의치 말라고 조언한다. 너무 억세지만 않다면 충분히 사투리도 매력적일 수 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B양은 성격마저 좋았다. 긍정적인 마인드 덕분에 항상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내가 면접관이라도 뽑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동기 3. C양


C양은 마인드가 남달랐다. C양과 함께 동기 비행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다. 현지 호텔에서 캐리어를 정리하며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체크하던 중 '여권, COM(안전 교본), 사원증만 있으면 괜찮아.'라고 말하는 나에게 '내 아이패드, 내 휴대폰이 난 더 중요해!'라고 쿨하게 말하던 그녀. 당시 그녀와 나는 1년 차 신입이었다. 바싹 군기가 들었던 나와 달리 C양은 여유가 넘쳤다.  



C양은 꿈을 위해 퇴사 후 대학원에 진학했고, 지금도 꿈을 향해 열정적으로 전진 중이다. 늘 귀감이 되는 동기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털털하고 시원한 C양의 성격 덕분인지 가끔 연락해도 어색함 없이 어울릴 수 있다.



동기 4. D양과 E양


D양과 E양은 나의 가장 친밀한 동기다. D양은 잘 다니던 직장을 뒤로하고 승무원이 되기 위해 제2의 도전을 한 동기, E양은 분명 키가 174cm는 되는 것 같은데 본인은 172cm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동기다.



두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그 힘든 시절을 버티지 못했을 거다. 힘든 손님 때문에, 힘든 선배 때문에, 힘든 비행 때문에 녹초가 된 날이면 어김없이 비타 500처럼 두 친구가 두둥등장 해주셨다. Day Off가 맞는 날이면 낮이건 밤이건 만나 노상에서 맥주를 마셨다. 그러니 서로의 흑역사, 연애사까지도 모두 속속들이 알고 있을 수밖에.  



나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입사동기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은 일,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주의. 그러나 승무원이 되니 달랐다. 특수한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타 직군에 종사하는 친구들과 나눌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았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면 '승무원이 뭐가 힘들어, 웃으면서 카트만 끌면 되는걸.', '좋겠다 외국 다니고 놀면서 돈 벌어서.'와 같은 망언을 듣기 일쑤라 결국은 다시 승무원 동기를 찾았다. 척하면 척, 쿵 하면 짝, D양, E양과 만나면 웃다 밤새는 줄 몰랐다.



그 외에도 너무 착해 태어나서 욕 한 번 안 해 본 동기(Off the record지만 이 동기는 승무원을 하면서 욕이 늘었다고 했다.), 외국에 나가서도 현지 요가 클래스를 찾아다니며 빈 틈 없이 자기 관리하는 동기, 말수는 적지만 할 말은 꼭 하는 다부진 동기 등. 이 글로 다 담을 수 없는 동기들이 있다.



합격생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수강생들의 FAQ다. 승무원은 모두 여성스러울까. 대한항공 승무원은 강아지상이고 아시아나항공 승무원은 고양이상, 제주항공 승무원은 '상큼하귤'상일까. 항공과를 나와야만 승무원이 되기에 유리할까. 승무원은 다 예쁠까.



그렇지 않다. 쌍둥이도 각자 개성이 있는데, 승무원 개개인도 모두 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 동기들 한 명 한 명이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으니, 오히려 한 명 한 명 강한 개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글을 쓰다 보니 동기들과 함께 교육받던 신입시절이 그리워져 온다.



승준생 시절,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승무원이 되나, 공항에 몇 시간이고 앉아 환상을 쌓아가던 나를 만난다면 이야기해줄 텐데.

'야, 너두 할 수 있어.'




공항가는 길












매거진의 이전글 I Feel PRETT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