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 Oct 29. 2020

나는 원래 화가 많았다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천사병을 어떻게 적절히 정의할 수 있을까.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마음고생은 혼자 다 하는 바보 천치병’ 정도가 아닐까. 사전에 등재된 단어도 아니니 내 맘대로 부여한 의미다.



나는 천사병 환자 중에서도 중증 환자 축에 속했다. 컴플레인은 해 볼 엄두도 못 냈다. 음식점에서 내가 주문한 음식 대신 옆 테이블 손님이 방금 취소한 차가운 음식이 대놓고 나왔을 때도 주인이 얼마나 바쁘면, 내가 안 먹음 이 아까운 음식 쓰레기 될 텐데, 말도 안 되는 이해심을 발휘했다. 승무원으로 일 할 때 좋은 손님들도 많았지만 악질적으로 승무원을 괴롭히는 손님들도 종종 있었다. 웃고 참아야 하는 직업 특성 때문이었을까. 세상에 나쁜 손님은 없다는 나만의 ‘세나손’을 찍으며 되려 내가 손님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행동을 했을 거라 합리화했다. 카페에서 내가 주문한 음료가 아닌 다른 음료가 나와도, 심지어 그 음료가 더 싼 음료여도 원래 마시고 싶었던 음료인 양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얼마 되지 않는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나 때문에 음료값을 물어내야 할지도 모르니. 정말 억울해 내 의견을 어필해야 할 때면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러니 그냥 넘기는 편이 내 정신건강에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00 이는 성격이 수더분하니 좋아, 00 이는 까탈스럽지 않아서 편해, 00인데 무슨 걱정이야 등등 나를 표현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들 때문인지 나는 앞으로도 쭉 천사로 남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난 4월 27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딸을 낳고 본격적으로 육아전쟁에 돌입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한 사람인지라 어느 정도 몸조리가 끝나면 다시 코칭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항공업계는 셧다운. 신입승무원을 뽑을 리 없었고 수강생도 당연히 없었다. 취준생이 아니라 항공과 입시 대비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내 동생이라면 보내지 않을 항공과를 미래가 창창한 아이들을 꼬셔 보낼 수 없었다. 최소한의 소신이었다. (항공과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항공과를 나오면 무조건 승무원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이유다. 너무 많은 대학들이 항공과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중 제대로 운영되는 곳은 손에 꼽힌다. 특수과인지라, 승무원이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졸업 후 아이들의 진로 폭이 너무나 좁아진다.) 행여 면역력이 약한 아기가 코로나에 걸릴까 집 앞 산책도 거의 나가지 못했으니 일도 못해, 나가지도 못해, 너무 예쁜 아기지만 하루 종일 아기랑만 엎치락뒤치락, 아무리 집순이인 나도 폭발 일보직전이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든 육아 때문에, 나의 잠재된 화는 분출하기 시작했다. 휴화산이 활화산이 되었다고나 할까.



최근 어느 공용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 손을 씻고 핸드타월 두 장을 연거푸 뽑는 나를 보곤 한 아주머니가 어마마마!! 하시며 혀를 끌끌 차신다. 평소의 나였다면 죄송해요, 제가 아무 생각 없이...... 하고 말았을 일을 그 날은 너무 화가 났다. 한 장만 쓰면 될 타월을 두 장이나 썼으니 낭비가 맞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타월도 아닌데 비난을 들을 필요도, 그분께 죄송해야 할 이유도 없다. ‘아주머니,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툭 던지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런 내 모습에 나도 놀랐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젊은것이 네가지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아기가 생겨 집이 좁아졌다. 필요치 않은 물건들을 처분하려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 가입했다. 집 평수치곤 컸던 6인용 식탁을 거래하던 중 문제가 생겼다. 구매자가 보낸 용달 트럭으로 이동 중 식탁 다리가 훼손된 것. 구매자였던 여자는 나에게 가격을 깎아달라고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니 과거의 나였다면 부탁을 들어주었을 거다. 싸움으로 번질 일은 손해를 보더라도 키우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이 없다. 애초에 직접 옮길 수 있는 분만 연락 달라고 했고, 가구이니 상태 확인을 위해 번거롭더라도 와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달 기사님만 보냈고, 우리 집에서 완벽한 상태로 전달된 식탁인데 이후 훼손된 문제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내 입장을 이야기하니 갑자기 없던 흠을 만들어 식탁 사진을 찍어 보낸다. 철저함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지. 전날 찍어둔 사진으로 되받아쳤다. 장문의 말도 안 되는 문자가 왔지만 내 선택은 과감하게 읽씹과 차단. 나에게 이런 배포가 있었다니!



아기가 6개월이 되어 생애최초 독감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 최근 독감백신 관련 사망 소식이 들려와 초보 엄마의 마음은 안달복달.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마음이 편하려 수입산 백신을 찾아 30개가 넘는 동네 소아과 전화에 전부 돌렸다. 한 소아과에 백신에 대해 질문하려는데 그냥 걱정 말고 오라는 짜증 섞인 대답을 들었다. 물론 수많은 환자를 봐왔을 테니 그들에게 독감주사 하나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으리라. ‘간호사 선생님, 선생님한테 우리 아기는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이지만, 우리 아기는 저한테 하나뿐인 생명이라 걱정이 안 되지 않네요. 바쁘신 건 알지만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그게 아니면 한가하신 시간 알려주시면 그때 다시 전화드릴게요.’ 그제야 나는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너무 까다로웠나 싶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다.



이 외에도 최근 나는 화나는 일들이 많았고 참지 않았다. 힘든 육아와 코로나로 억눌린 답답함은 억눌렸던 감정을 쏟아낼 수 있게 만들었다. 나를 알던 지인들은 내가 변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내 모습이 보인 것일 뿐. 원래의 내 모습이다. 나는 원래 화가 많은 사람이다.





나의 활화산은 오늘도 열일 중



























작가의 이전글 남편에게 선물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