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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애 Jul 25. 2019

시어머니 흉보는 간 큰 며느리

딸 같은 며느리의 착각

어제는 시 할아버지의 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이러저러 사정과 함께 가족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길 원하셨던 아버님의 뜻에 따라 며칠 당긴 주말로 정해졌다. 마침 금요일 신랑은 시댁이 있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갔다. 다시 집에 올라왔다 내려가면 피곤할 것 같아 갈아입을 옷을 챙겨 출근시켰다.

토요일 아침,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늦잠을 자는 아이들을 깨워 혹 내려가는 길 멀미라도 할까 간단하게 누룽지 밥을 먹이고 멀미약도 챙겨 먹인다. 운전을 한 시간 이상하면 날개쭉지에 담이 들곤 하는 나는 차에 타자마자 멀미약 기운에 잠이 든 아이들이 깰까 2시간을 달려서야 겨우 휴게소에서 한숨을 돌렸다.


"집 근처 다 왔어. 좀 내려와 줘."


"왜?"


왜냐니? 아이들은 금방 잠에서 깬 상태고, 가져온 옷 봇다리와 짐이 한가득인데... 눈곱이 낀 상태 그대로 슬리퍼를 끌고 내려오는 신랑 뒤에는 어머니도 함께다. 아이들을 하나씩 끌어안고는 오는데 멀미는 안했냐며 걱정했던 마음을 내려놓으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식탁 위에는 제사에 쓰일 전 거리가 한가득이다. 아이들이 누룽밥만 조금 먹고 왔다는 말에 어머니는 급하게 점심상을 보신다.


"네가 꼬지 준비해라. 내가 점심 상 볼 테니, 네가 꼬지는 나보다 훨씬 잘하잖니."


칭찬을 섞어 이야기하셨지만 '어머니, 저 시댁 들어와서 아직 방바닥에 엉덩이도 못 붙였거든요.' 속으로 서운한 마음을 속삭여본다. 햄, 맛살, 쪽파, 버섯을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이쑤시개에 꽂는다. 운동을 다녀오신 아버님께 아이들과 절을 올리곤 하던 일을 마저 한다. 꼬지를 꽂고 있던 나를 보고 아버님은 조금만 하지 왜 이리 많이 하냐고 하신다. 


"언제는 이렇게 안 했간? 식구가 몇인데..."


전을 유독 좋아하는 아들들을 위해 어머니는 제사상에 올라가지 않는 호박전, 팽이버섯전, 오징어전까지 준비해두셨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칼칼한 김치찌개로 밥 한 공기를 뚝딱하고는 마저 전거리를 준비한다. 조금 더 늦게 오신 형님 식구가 점심을 드시는 사이 신랑과 나, 어머니는 함께 앉아 전을 부친다. 아들에게 전 부치는 것을 거들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우리 아들들은 이런 것도 시킨다.'라는 자부심도 자랑도 아닌 어떤 미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점심을 먹기 전까지 방에서 TV를 틀어놓고 자고 있던 아들이다.


"쟈, 피곤해서 좀 자야 혀. 새벽 2시쯤 들어와서 잠도 못 잤응께."


'어머니,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3시간이나 빗길을 운전하고 왔거든요. 그리고 오빠는 어제 친구들 만나 술 먹고 놀다 왔거든요. 피곤할까 봐 쉬라고 먼저 보냈더니 놀다 들어와서 피곤한 거거든요.'


또 속에 혼잣말이다. 


형님이 점심 뒷 설거지를 하시고 함께 전을 부치자 자연스럽게 신랑은 뒤로 빠진다. 제사상에 올라갈 전이라 먼저 손도 못 대어 보는 전이 신랑 입으로는 잘도 들어간다. 운전하고 온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전 부치기가 끝이 났다. 비가 내리는 날 전과 막걸리가 땡기기 마련이지만, 종일 기름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멀미가 밀려온다. 같이 옆에서 전을 부치던 어머니도 같았으리라. 


"애구, 전 부치느라 고생했다. 너희는 어쩜 그리 뚝딱 잘도 하냐. 기름 냄새 맡았더니 니글니글한 것이. 우리 맥주나 한잔 하자."


시원하게 김치냉장고에 들어 있던 맥주를 꺼내 며느리들에게 권하신다. 한 잔을 쭉 들이켜니 속에 있던 체기가 가시는 것 같다. 두 잔을 받아 마시니 수박도 썰어오신다. 그러곤 예전 시집살이하시던 시절을 읊으신다. 예전엔 그래도 이것저것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런 것도 왜 이리 귀찮냐며 취해서 별소리를 다한다며 멋쩍어하신다.


"어머니 저도 하기 싫어요."


나도 술기운을 빌어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서 전 부치는 거 시장에 팔기도 하고, 조금씩 부칠 수 있는 재료를 팔기도 한다고 운을 띄워본다. 그래도 아마 전 부치기는 몇 년은 더 할 터이다. 이 또한 내가 자처한 일이기도 한 것을...(그 이유는 뒷 이야기로 남겨둔다. 여우 같은 며느리의 잔꾀에서 비롯된 것이니)


다음 날 비가 와서 어려웠지만 제사 음식을 들고 산소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차가 밀리기 전에 올라가자는 신랑의 말에 어머니가 싸주시는 사골과 감자 등을 잔뜩 싣고 출발한다. 물론 전날 부친 전도 한 봉지 가득이다. 어머니, 아버님 드실 전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싸주신다. 그렇게 싸주시고 싶으셨으리라...


운전대를 잡는 신랑을 보고 걱정스레 한마디 하신다.


"또 운전하고 올라가려면 대근헐텐디..."


'어머니, 저는 어제 운전하고 내려와서 전도 부치고 상도 차리고 산소도 다녀왔거든요.'



이렇게 글을 적고 나니 어머니 흉을 잔뜩 본 것 같다.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조금 섭섭했던 거랄까? 사실 그 섭섭함은 신랑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렇게 시대에서 보내고 올라오는 길이면 고속도로로 들어서기 전 고맙다, 고생했다, 네가 최고다, 너 같은 며느리가 없다 하며 추켜세우곤 했다. 그 한마디에 나왔던 입도 쏙 들어가던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톨게이트를 들어가기 전부터 하품으로 신랑의 눈가는 눈물로 그득하다. 혹여 졸음운전이라고 할까 봐 피곤에 쩌든 나도 함께 가상 운전을 한다.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시다. 잘하는 것은 추켜 세워주시고 아침에 늦잠을 자도 혼자 아침상을 다 차려놓으신다. 설거지가 끝나는 타이밍에 커피물을 끓여 놓으시고, 설탕을 빼고 먹는 며느리 취향에 맞게 믹스커피를 조절해 주실 줄도 안다. 떡을 좋아한다고 매번 따끈따끈한 떡을 일부러 사다 놓으시고 싸주신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도 아들이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잊지 않고 챙겨주신다.


나도 어머니를 편하게 대하는 편이다. 어려서부터 어른 무서운 걸 몰랐던 터라 처음부터 어머니가 어렵지 않았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와 목욕탕, 찜질방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 셋만 키운 어머니와 함께 목욕을 가면 속에 있던 신랑 흉을 봐도 같이 맞장구를 쳐주시곤 했다.


앞의 글의 '작은따옴표'속의 이야기는 보통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이다. 어찌 된 것인지, 퇴사를 하고 난 이후 혼자의 자격지심으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행여 내가 어머니께 이야기했다 손 치더라도 어머니는 쿨내 나게 야단을 치시던지, 진심을 담아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말씀하셨을 거다. 속에 담아놓고 글로 쏟아내니 딱 시어머니 흉 본 꼴이다.


괜히 죄송한 마음 한가득이지만, 요렇게 써 놓은 글을 몇 년이 지나 어머니와 함께 보면 또 우리 어머니는 쿨내 나게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


"내가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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