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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애 Sep 03. 2019

할머니의 쭉쭉이

"할머니! 할머니! 쭉쭉이 안 했어요."


유치원 가게 일어나라고 주방에서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우리 작은 아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매일 해주시던 쭉쭉이를 그냥 넘어가나 싶어서다. 할머니는 "이 놈의 자식, 네가 할머니를 해줘야지 언제까지 할머니가 해주냐." 하시며 손주의 방으로 들어가신다.


어려서부터 호기심 많던 작은 아들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까치발을 들고 걷더니 일곱 살이 된 지금도 걸음 걷는 폼이 엉성하다. 그런 손주가 걱정되는 할머니는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으레 껏 해오던 쭉쭉이를 7년째 해주고 계신다. 쭉쭉이를 받고 있는 아이의 폼은 가관이다. 흡사 고급 마사지숍에서 팁 많이 주고 마사지를 받고 있는 사모님 포스라고나 할까. 그런 아이를 보면서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내 다리는 엄마를 꼭 닮았다. 김장철 잘생긴 조선 무를 보면 식구들은 "그래도 조선무가 예쁘지." 하면서 엄마 다리와 내 다리를 빗대어 이야기한다. 시래기가 배추인지 무인지 몰랐다는 우리 신랑은 나를 만나고 확실하게 알았다고 한다. 내 이름을 발음대로 부르면 시래(실애)이기에 연상되는 것을 생각하면 무가 딱 떠오른다고. 


여하튼 쪽 뻗은 조선무와는 다르게 우리 엄마의 다리는 오다리이다. 큰딸인 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왜소하고 작은 얼굴에 비해 통통한 다리를 보며 우리 아빠는 걱정이 가득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태어나면서 시작된 아빠의 쭉쭉이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훌쩍 컸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4학년쯤 되었을 때는 잠들기 전에 오셔서 두 다리를 넓은 끈으로 묶어주시기 까지 했다. 그 넓은 끈으로 유전의 힘을 이겨보리라는 아빠의 신념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나는 외모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부터는 교복 이외에는 발목 위로 올라가는 바지나 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다. 대학원 시절 며칠 밤을 새울 때 어쩔 수 없이 반바지를 입고 선배들 앞에 나섰다. 얼굴과 무릎 크기가 비슷한 내 다리를 누가 먼저 놀릴세라 내가 먼저 선수치곤 했다. 아빠는 나 어릴 때부터 다리를 엄청 주물러 주셨는데, 그래도 이 모양이라고. 그때 선배 하나가 직설을 했다. 


"그렇게라도 해주셨으니 그 정도나 된 거 아니냐." 


맞다. 다행히 내 다리는 엄마와 다른 게 있다면 차렷하고 서면 무릎 사이가 뜨지는 않는다. 그렇게 아빠의 쭉쭉이로 두 아들을 임신했을 때부터는 시원하게 종아리를 내놓고 원피스를 입기 시작했다. 이젠 모 다리만큼이나 튼튼해진 몸뚱이로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 쭉 뻗은 통통한 내 다리.


갑자기 할머니의 쭉쭉이. 곧 내 엄마가 내 아들에게 해주는 쭉쭉이를 보면서 아빠가 떠오른 것은 할머니에게서 받는 쭉쭉이에 대한 고마움을 아는 아들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꼭 할머니의 다리를 힘껏 주무를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아빠의 다리를 주물러드리지 못한 나를 돌이켜보면서 바로 반성 모드로 들어간다. 핑계지만 다행인 것은 아직은 건강한 다리를 유지하고 계시는 아빠라는 거다. 무뚝뚝한 큰 딸이 아빠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그 날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오늘 저녁엔 내 다리를 닮아 굵지만 굽어진 엄마의 다리를 내 아들을 대신해서 주물러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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