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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애 Sep 16. 2019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

2019년 추석을 보내며...

이번 추석은 다른 때와 달리 하루 일찍 시작되었다. 빨간 날짜 전날 시댁에 도착했다. 남편의 휴가 찬스로 아이들의 하교와 함께 시댁으로 향했다. 2주 전 벌초 갔다가 올라오는 길 5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참사를 겪었던지라 하루 일찍 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추석 전 휴일이 하루밖에 없을 때는 얼마 걸릴지도 모르는 고향 가는 길(남편의 고향 가는 길)은 며칠 전부터 피곤함이 예정되어 있기에 더욱 힘들었다. 직장을 관두고 처음 맞는 추석이다. 그래서인지 차라리 하루 일찍 가서 쉬고 아침부터 전을 부치는 게 더 편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댁을 하루 일찍 간다는 거에는 누구나 느끼는 당연한 불편함이 따르지만 말이다.


명절 전 나는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를 준비한다. 아니 시댁에 갈 때면 으레 그렇다. 본래 착하고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닌지라 코스프레라 하는 것이 맞다. 잘 웃는 며느리, 어머니 말씀에 맞장구 잘 치는 며느리, 어머니께서 준비해 놓으신 음식들 앞에서 감탄하는 며느리, 전 잘 부치는 며느리......


사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시댁 조상님을 위해 전을 부치고,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간다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차린 음식을 드시고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실까? 하는 의문도 든다. 나는 사후 효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살아계실 때 잘하는 게 우선이지. 이런 생각이 쌓이고 쌓여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가 시작되었다.


조상님을 위한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 아버님께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행사다. 아버님의 아버지 묘에 무릎 꿇고 앉아서 아픈 형님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축문을 읽으실 때마다 매번 떨리는 목소리를 듣곤 한다. 아버님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슬쩍 훔쳐본 아이들의 느낌은 추석을 지내고 온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러하기에 아버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그 제사를 그냥 막 흘릴 수 없다. 어차피 차린 음식은 우리가 다 먹을 거고, 겨우 전이나 부치는 게 다다. 더구나 식구들은 전을 참 좋아한다. 다만, 손 큰 어머니의 준비성이 좀 버거울 뿐...


시댁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약간의 호들갑으로 시작한다. 집에서는 그리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내려가는 차 안에서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정도다. 하지만 시댁 근처에 오면서 나의 목소리 톤은 조금 올라간다.

 "아버님, 저희 거의 다 왔어요. ㅎㅎ 놀라게 해드릴라고 미리 전화 안 드렸어요. 저녁은 드셨어요? 우리는 가서 치킨에 맥주 먹을래요. 어머니 저녁 준비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내일 올 줄 알았던 손주가 하루 일찍 온다 하니 아버님의 목소리도 덩달아 올라감을 느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은 오는 동안 쭉 잠을 자서 멀미를 하나도 안 했다느니, 국도로 요리저리 와서 차는 하나도 안 막혔다느니, 남편이 며칠 전부터 치킨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오늘은 꼭 치킨에 맥주를 먹어야 한다느니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며느리다. 그런 며느리의 말에 하하호호 웃어주시며 다행이다, 그럼 치킨 먹어야지, 배고플 텐데 얼른 시키자며 단골 치킨집에 전화를 하신다.


잠자리에 들어 나의 모습을 잠깐 돌아보니 웃음이 났다. 웃음기 없는 평소의 모습과 달랐던 나의 모습. 내가 다 어색하다. 하지만 일부러라도 하이톤에 웃음을 섞고 시부모님과 대화를 이어나가니 어느새 진짜 나도 웃고 있었다. 치킨은 맛있었고 맥주는 시원했다. 다음날 아침 남편까지 대동해서 어머니께서 준비해 놓으신 전을 부친다. 이번에도 동그랑땡은 미리 반죽해두시고, 꼬지도 다 끼워놓으셨다. 반조리된 동그랑땡이 더 맛있다는 남편의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매운 양파와 각종 야채를 다지느라 죽을 뻔했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조용히 동그랑땡을 빚어 달궈진 팬에 올린다. 조금 서걱서걱하게 다져져 잘 뭉쳐지지 않는 동그랑땡이다. 


"조금만 한다고 했는데 난 왜 이렇게 손이 크냐. 문제야 문제."


먼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며 부치기 힘들다고 손바닥 만하게 동그랑땡을 빚으신다. 형님까지 오셔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전을 부치니 오전 안에 모든 것이 끝났다. 추석 전 친정 엄마와 장을 보며 "이번엔 어머니가 얼마나 또 준비해두셨을까?" 했더니 엄마는 "내가 가서 좀 부쳐주랴?" 하셨다.


 "그래도 그렇게 두런두런 앉아서 전이라도 부치고 할 때가 좋았던 거 같다. 기름 냄새도 나고 해야 추석 느낌도 나고 그렇지."


며느리 탈을 벗은 우리 엄마가 그리워하는 그 명절은 서울에서 출발해 꼬박 밤을 새워가야만 시골에 도착하던 그 때다. 할머니는 며칠 밤을 새워가며 아들들이 좋아하는 동동주를 담그셨다. 떡을 좋아하는 며느리와 손녀보다 단 걸 싫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송편도 백설기에도 설탕을 아끼셨다. 전을 부치기 시작하면 조상님께 올릴 전을 따로 둔 뒤에는 꼭 하나밖에 없는 손자, 장손을 위해 한 접시 담아내어가시곤 했다. 난 항상 그런 할머니의 편애가 싫었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그렇게 아끼던 손자 얼굴은 몇 년간 보지도 못하셨다. 그런 할머니는 나에게 아들을 주시고 내 앞에서 눈을 감으셨다. 나에게 이제 할머니의 제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할머니와 함께 했던 할머니와의 마지막 순간들을 기억하며 어떤 미련도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는 이런 맥락이다. 살아계실 때 잘하고 미련을 남기지 말자. 그런데 그렇게 착한 척을 하다 보니 조금 착해지는 기분도 든다. 마음이 조금 더 편하다.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을 위해 전을 부치고 차례상을 본다 생각하면 불편하다. 힘들어 죽겠는데 산소까지 따라가야 한다는 것 또한 그렇다. 하지만 일 년에 몇 번이나 본다고 이럴 때 앉아서 이야기하고 어차피 식구들 먹을 거 준비한다 생각한다. 어머니가 자식 먹일라고 준비한 거 조금 더 거든다 생각한다. 결혼 전에는 일부러 산악회까지 가입해서 전국을 누볐다. 일부러도 다녔는데 특별히 시간 내지 않고 등산한다 생각한다.


하루 일찍 시작된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는 역시나 길게 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이지 착한 아내 코스프레는 아니다. 추석 날 저녁 삼겹살을 구워 먹다 눈치 없는 남편 때문에 짜증이 머리 끝 바로 직전까지 올라왔다. 결국 친정 이모 댁에 간다 하고 남편과 집을 나섰다. 바로 옆 동네 사시는 이모 댁에 우리 부모님이 와 계셨고 저녁을 함께 먹기를 원하셨지만, 이미 시작된 삼겹살 구이로 인해 빨리 일어서지 못했다. 이미 끝났을 줄 알았지만 신랑을 재촉해 나왔다. 그리고는 10년 차 며느리지만 시부모님 앞에서 친정 이모 댁 가기가 눈치 보이지 않겠냐, 갈 거면 얼른 일어나야지 그렇게 어머니 소주 심부름까지 시키면서 먹고 있어야 되겠냐. 불만을 한껏 늘어놓았다. 발길 닿는 데로 근처 커피숍에 가서 아이스커피를 생맥주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니 남편은 무안해한다.


"내일 아침 일찍 올라가자."


원래는 다음 날 저녁밥까지 먹고 아이들 자는 시간에 올라갈 생각이었지만 하루 더 있다가는 가면이 벗겨질 것 같았다. 꼭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아들과 싸우는 며느리를 보여드릴 필요는 없다. 늦게 마신 커피 덕에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8시가 훌쩍 넘어 눈을 떴다. 늦은 아침을 먹고 어머니께서 아이스팩을 켜켜이 넣어 싸주신 잡채와 전을 들고 시댁을 나섰다. 지금이 딱 안 막히는 시간이라고 또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새삼 우리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조금 더 편하다고 막 내뱉는 말이며 짜증 섞인 말투며 맞장구치지 못하고 무시했던 나의 행동들이 떠오른다.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를 하다 보니 더 착해진 기분에 괜히 더 웃음이 많아졌던 나를 돌아보며 집에서도 조금 더 친절한 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 딸 코스프레도 필요하다. 잠깐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웃음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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