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했던 나를 돌아보다.

01 나를 인정한다는 것

by 성실애

직장생활 3년 차, 아이를 낳고 힘들다는 게 들킬세라 바쁘게 움직였다. 육아에 직장생활까지 해내는 나를 곁에서 지켜보던 동료는 나에게 모든 걸 다 잘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무엇을 안 해도 되는지를 찾고, 내가 안 해도 되는 일은 과감히 그 책임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이렇게 조언해 주는 이는 없었다. 나의 삶의 무게가 들킨 것만 같았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회사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소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 바쁘게 움직였다.


수년이 지나고서야 그 동료의 진심 어린 말의 뜻을 이해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을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나 또한 당연했기에 그 짐을 내려놓을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내려놓을 수 있는 것 또한 능력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첫 아이를 낳고 18개월까지 지방에 계시는 시댁 부모님께 아이를 맡겼다. 주말이면 아이를 보러 가서 일주일치 이유식을 꼬박 4시간씩 걸려가며 만들었다. 이유식은 꼭 엄마 손으로 만들어 먹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를 돌아보며 지금은 후배 워킹맘들에게 말한다. 시중에 이유식 좋은 거 많이 나온다고, 사 먹여도 된다고, 그 시간에 아이와 눈 한 번 더 맞추라고...


책임감과 내가 가진 모든 역할에 사로잡혀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


초, 중, 고 12년에 대학, 대학원 그리고 직장생활 11년 동안 딱 한 번의 지각이 있었다. 큰 아이 학교 선생님과 면담이 있는 날,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가 앞에서 난 사고 때문에 꼼짝없이 길에 갇혀버렸다. 그렇게 회사를 23분 지각하고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이런 때는 왜 엄마만 학교를 가야 하는지 분하고 억울해서 괜히 신랑한테 화풀이를 했다.


그랬다. 남편과 나눠도 되는 부모의 일을 엄마의 책임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나눌 수 있는 일은 나눠도 되는데 말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한 달 후의 계획을 세워둔다. 달력에 시댁에 가야 할 일, 아이 행사, 학교 행사 등등을 적고도 빈 날짜에는 무엇을 할지 고민한다. 여행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시간별로 여행 경로와 맛집까지 미리 찾아서 계획을 세워둔다. 여행사 스케줄표 같이 짜인 종이를 프린트해서 들고 여행을 떠난다. 꼭 가고자 했던 맛집은 줄을 서야 하고, 아이의 잠투정으로 다음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렇게 스케줄이 꼬이면 짜증이 난다. 하지만 쿨하게 털어 버리기로 하고 유연하게 일정 변경을 시도하고 다시 그 일정에 맞게 다시 계획을 세운다.


아니다. 쿨하지 않았다.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내고, 계획대로 되지 못하고 놓쳐버린 기회들에 대한 원망을 어딘가에 꼭 쏟아놓고는 한다. 여행으로 느끼고자 했던 휴식과 관광, 여유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틀어진 계획을 어찌해야 할지에만 급급하다. 안 세우느니만 못한 계획이다.


아이들과 캠핑을 가고 싶었다. 차가 작아서 캠핑을 못 간다는 신랑의 말에 어찌어찌 없는 돈을 끌어 모아 차를 바꿨다. 그리곤 캠핑용품을 하나, 둘 장만했다. 여러 캠핑 관련 온라인 사이트를 다니며 캠핑에 필요한 물건을 체크리스트로 만들고 예산에 딱 맞게 샀다. 그리곤 캠핑을 잘 다니는 아이 친구 집과 첫 캠핑을 갔다. 첫 캠핑을 인도한 아이 친구 부모는 우리의 캠핑 장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첫 캠핑치고는 너무 디테일한 준비였기 때문이다. 무엇을 시작하든 어설프게는 싫다.


하지만, 신랑은 어설펐다.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캠핑장비를 싣고 가서는 애꿎은 신랑만 나무랐다. 남자가 이런 것도 못한다고. 결국은 혼자 텐트 치는 동영상을 보면서 텐트를 치고, 난로에 불을 지폈다. 너무 힘들어서 캠핑의 낭만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돈은 돈대로 쓰고 힘들기만 한 캠핑 다시는 가기 싫다는 신랑의 원망만 들었다.


연애시절 신랑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뭐해?"라고 물어봤을 때 "그냥 있어."라고 답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내가 전화해서 "뭐해?"라고 물어보면 하다못해 "TV 보고 있어."라고라도 대답해 달라고 했다. 나는 TV도 잘 보지 않지만, TV를 볼 때도 항상 손에 뜨개질이나 종이 접기라도 한다. 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보내고 있다는 건, 나에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감우성, 손예진이 출연한 <연애 시대>라는 드라마가 있다. 우리 신랑이 정말 좋아해서 소장해 놓고 보는 드라마다. 나의 연애시절 신랑은 자취방에서 노트북을 건네며 자기가 공부하는 동안 그 드라마를 보고 있으라 했다. 나는 그 드라마를 2배속 빨리 보기, 10초 건너뛰기의 방식으로 아주 빠른 시간에 봤다. 그런 나를 보고 신랑이 불같이 화를 내며 노트북을 빼앗아 갔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함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감성 포인트를 맞추는 일이 힘들다. '줄거리만 알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메마른 나와 등장인물의 감성과 대사, 거기에 나오는 음악까지도 곱씹어봐야 하는 우리 신랑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지금은 감성 충만한 신랑을 꼭 빼 닮음 우리 큰아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일이 너무도 힘들다.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엄마와의 대화가 쉽지 않은 우리 아들은 힘들고 문제가 있는 일은 엄마보다는 아빠를 찾는다. 친구와의 다툼이 있을 때 엄마는 항상 친구 편을 든단다. 아닌데, 누구보다 난 우리 아들 편인데 말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산만해 보이는 탓에 3개월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그리고 육아휴직 첫날 아이들을 학교, 유치원에 보내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휴직 전 날, 전사 마라톤 대회에서 마라톤 하프를 뛴 탓에 욱신 거리는 몸을 목욕탕 세신 아주머니께 맡겼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아이들이 올 때까지 잠을 잤다. 다음날도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잠깐 누워있는다는 것이 점심도 안 먹고 둘째 아이가 하원 할 때까지 잠을 잤다. 그 바람에 아이의 하원을 놓칠 뻔했다. 이틀을 그렇게 잠으로 보낸 내가 너무 한심해서 퇴근한 신랑에게 내가 이틀 동안 한 일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자 신랑이 나에게 말했다.


"넌, 좀 그래도 돼. 좀 자고, 좀 쉬고. 잘했네"


10년을 일과 아이들 사이에서 허덕이던 내가 처음으로 평일 낮시간을 잠으로 보낸 것을 스스로 한심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제대로 놀고, 일하고, 즐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제대로는 없었다. 혼자만의 만족이고 혼자만의 계획이었다. 아니,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나 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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