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고
‘나는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
서점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발견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문구다. 다섯 살 꼬마 제제의 슬픈 이야기라고 기억해야 하지만 내 머릿속엔 단지 저 문구만이 남아있었다. 제제가 그만큼이나 성숙했던 것이었는지, 나의 기억이 저속했던 것인지 쉽게 이해가지 않았다. 그 부분을 찾기 위해 책장을 넘긴 나는 제제에게 푹 빠져버렸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총 2부로 되어 있다. 1부는 제제의 라임오렌지나무 ‘밍기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면, 2부는 제제의 단 한 사람 뽀르뚜가와 보낸 시간이 그려있다. 크리스마스에 선물하나 받지 못하고 구두닦이를 나가야 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는 제제는 크고 작은 말썽에 수도 없는 매질을 당한다. 불우한 환경이지만 새로 이사 간 집에서 만난 라임오렌지나무와 속 이야기를 나누며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한다. 혼자 글을 깨우칠 만큼 영리한 꼬마 제제는 때론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기도 하지만 어린 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하며 잘 돌본다.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착한 아이가 되고 마는 제제는 어찌 보면 그냥 평범한 다섯 살 아이였다.
착한 아기 예수도 자신을 싫어한다고 믿는 제제는 멋진 차를 가진 뽀르뚜가를 만나고는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자신을 아들처럼 위해주고 보살펴주는 뽀르뚜가 앞에서는 한없이 천진한 아이가 되는 제제. 그렇게 의지하던 뽀르뚜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놓아버린 제제는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고 만다. 하지만 그를 걱정하고 곁을 지켜주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밍기뉴로 인해 마지막 기운을 낸다. 어른 나무가 되려고 첫 번째 꽃을 피운 마법에서 풀린 밍기뉴처럼 제제도 힘껏 철이 든다.
공개된 장소에서 읽을 책이 아니었다. 커피숍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읽으려 했던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사람들에게 들킬세라 한쪽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기가 무섭게 다른 눈이 흐려졌다. 다섯 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성숙한 제제는 수도 없이 나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어쩜 이리도 슬픈 소설을 지었을까?
크리스마스 아침 빈 운동화를 보고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아빠가 가난뱅이라서 진짜 싫어.”라는 말을 내뱉는다. 옆에서 그 말을 들어버린 아빠에 대한 죄책감에 구두를 닦아 아빠를 위한 선물을 건넨다. “아빠....... 아빠가 절 때리시겠다면 반항하지 않겠어요. 막 때리셔도 좋아요.”흐느끼는 제제에게 그저 아빠는 과일 샐러드를 떠 넣어준다. 제제의 처지가 딱해서였는지,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 못 사준 아빠의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제제의 흐느낌만큼 내 마음도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
벌거벗은 여자를 원해
밝은 달빛 아래서
여자의 몸을 갖고 싶어.......
돈이 없어 카드놀이도 못 나간 슬픈 눈의 아빠를 위로하기 위해 제제는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생각하는 탱고를 부른다. 화가 난 아빠가 다시 불러보라고 할 때마다 제제는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를 부른다. 뺨을 맞고도 또 부르기를 반복한다. 이유를 알 수 없다. 왜 또 불러야 하는지, 또 왜 맞아야 하는지. 이미 가족들에게 심한 폭력을 당해 학교도 며칠째 가지 못했던 제제는 아빠가 휘두르는 허리띠에 맞아 정신을 잃는다. 순수했던 아이의 마음은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진다. 정신을 겨우 차린 제제는 인생에서 가장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을 꺼낸다. “엄마,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내 풍선처럼 됐어야만 했어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한 자락은 이렇게 가슴을 후벼 파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듯하다.
너무나 처참하고 비극적으로만 느껴지는 소설이지만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제제를 지켜주는 사람들이다. 항상 제제를 매질에서 보호해주는 글로리아 누나와 제제를 항상 믿어주고 자랑스러워하는 쎄실리아 빠임 선생님, 그리고 제제를 양아들로 삼고 싶어 할 만큼 돌봐주는 뽀르뚜가가 제제 곁에 있었다. 뽀르뚜가는 또 매질을 당할까 봐 유리조각이 박혔던 다리로 학교를 가던 제제를 병원에 대려가 주고 제제가 하는 나쁜 말투도 바로 잡아준다. 상처투성이인 아이를 가여워하며 제제의 모든 말에 귀 기울여 준다. 뽀르뚜가 만이 제제를 진정 다섯 살 아이로 대해준다. 제제는 뽀르뚜가 덕분에 착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하지만 열차에 치여 뽀르뚜가가 죽자 제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글로리아 누나에게 고백한다.
“착해질 필요 없어. 그냥 네가 늘 그랬듯이 어린애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제제를 다섯 살 아이로 바라보고 옆을 지켜 준 또 한 사람 글로리아 누나가 있기에 제제는 점점 더 기운을 차린다.
“아주 착하게 굴게요. 싸움도 안 하고, 욕도 안 하고 볼기짝이란 소리도 안 할게요. 당신과 늘 함께 있고 싶어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작가 주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로스의 자전적 소설이다. 주인공 제제는 애칭이며 진짜 이름인 주제인데, 작가의 이름과 동일하다. 저자는 1920년 리오데자네이로의 방구 시에서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인디언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권투선수, 바나나 농장 인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다. 1986년 발표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유례없는 판매 기록을 세우고 세계 21개국에 번역이 되었다. 그의 후속작인 <햇빛사냥>는 십 대의 제제를, <광란자>는 성년이 된 제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성장 소설은 언제나 주인공이 어떻게 자라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작가의 소개를 쓰다 나는 바로 <햇빛사냥>과 <광란자>를 주문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처럼 슬프지 않기를 바란다.
원초적 조건조차 충족시키지 가정에서 가정폭력을 당해야만 했다. 그 아이가 스스로 눈칫밥을 먹으며 철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철들지 않은 우리 아이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동식물과 교감하고, 말썽을 피우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조그만 관심에도 애착을 보이는 제제의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자는 ‘제제’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을까? 눈물 짜는 그런 슬픈 이야기만 전달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아기 예수조차 돌보지 않은 제제지만 그 아이를 믿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아이는 악마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던, 선생님이던, 이웃의 그 누구든지 말이다.
<참고도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박동원 옮김, 동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