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를 읽고
어느 송년모임 워크숍에서 강의가 있던 날, 송년 느낌도 즐기고 여유도 부려볼 겸 코엑스의 별마당 도서관을 찾았다. 겨울을 한껏 살린 금빛 트리 앞에서 책과 어우러진 사람들은 한껏 브이를 그렸다. 즐비해 있는 책 사이를 거닐다 <노인과 바다>를 집어 들었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을 채우기에 적당한 두께였다. 별마당 도서관을 휴게처로 삼은 노인들 사이의 비교적 푹신한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미 약속이라도 되었던 듯 두 시간을 꽉 채워 펼쳤던 책을 덮었다.
할아버지, 바다, 낚시, 물고기 모두 나에겐 낯선 소재였다. 하지만 읽는 내내 한 번도 쉼이 없을 정도로 푹 빠져 읽었다. 옆에서 갈라진 손에 바셀린을 바르던 할아버지가 산티아고라도 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나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산티아고와 하나가 되어갔다.
<노인과 바다>는 바다에서 나서 바다와 함께 일생을 살아온 노인 산티아고와 산티아고를 지지하는 소년 마놀린이 나온다. 산티아고는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하지만 소년 마놀린만큼은 산티아고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85일째 되던 날 드디어 거대한 물고기를 만나게 된다. 이틀 밤을 지새우며 처절한 사투 끝에 노인의 배보다도 더 큰 청새치를 잡는다.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지만, 고기를 노리고 달려드는 상어 떼의 습격으로 노인은 고기를 보호하기 바쁘다. 노인은 사력을 다해 상어 떼와 싸우지만 며칠 힘을 뺀 노인은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한다. 결국 상어에게 뜯어 먹힌 고기는 앙상한 뼈와 머리, 꼬리만 남게 된다. 노인은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두 시간 만에 읽어 내려가기에 손색없을 만큼 간결한 문장으로 쉽게 쓰여 있다. 그만큼 글 자체만큼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와 함께 일 때, 바다와 함께 하는 그 모든 것과 산티아고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고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삼은 탓에 친구로 칭하는 청새치를 잡아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고기의 마음을 읽고 함께 하는 동지로 여긴다. 운을 탓하면서도 운명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노인은 생각했다. 다만 더 이상 운이 없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아? 오늘이라도 운이 트일지?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니까.
그렇게 채비를 하고 마놀린에게서 얻은 미끼 다랑어 두 마리를 싣고 바다를 나간 그 날 운이 찾아왔고 노인은 그 운을 놓치지 않는다. 소금기 없는 고기를 먹으며 힘겹게 줄 하나에 연결된 고기를 잡고 있을 때는 그 운을 하느님께 간청하기도 한다. 상어 떼의 습격으로 잡은 물고기를 잃었을 때 노인은‘미안하구나, 물고기야. 애당초 너를 낚은 게 잘못이었어.’라고 자기의 선택을 한탄하기도 한다.
물고기를 낚는 내내 노인은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 애가 있으면 좋을 텐데.”마놀린은 운이 없는 노인과 함께 바다에 나갈 수 없다. 소년의 부모는 그가 노인 곁에 있도록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께 다섯 살 때부터 고기 잡는 법을 배운 소년은 기운이 없어져 가는 노인을 보호하고 싶다. 함께하고 힘이 되어 주고 싶다.
“물론 유능한 어부들이 많을 테고 그중엔 훌륭한 어부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최고는 할아버지뿐이에요.”
작은 돛단배 하나로 넓은 바다 한가운데로 혼자 나갈 만큼 할아버지는 바다를 잘 알고 있다. 구름과 물결과 별만 보고도 며칠의 날씨를 가늠한다. 그렇기에 배보다도 더 큰 물고기를 가늠하고도 그 물고기의 상태를 읽으며 사흘 밤 낯을 씨름한다. 하지만 이제 그도 노인이다. 스스로 노망난 노인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도 혼잣말을 계속한다. 배에 잠시 쉬어가는 작은 휘파람새도 반갑다. 자신의 낚시찌를 물고 있는 물고기에게도 말을 건다. 쥐가 난 손을 위해 다랑어를 먹으며 힘내라고 전한다.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라고 자신에게 호통을 치기도 한다.
“이보게, 늙은이, 생각일랑 집어치우게.”
“이대로 항해나 계속하게. 그러다 일이 닥치면 그때 맞서 싸워.”
혼잣말을 내뱉는 노인을 보며 십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식사를 하시면서도, 청소를 하시면서도 중얼중얼거리시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혼자 외로웠을 할머니가 말이다.
헤밍웨이는 아주 자세하게 바다와 물고기 그리고 노인이 고기를 잡고 사투를 버리는 장면들을 묘사했다. 처음에 언급했듯 나는 고기를 잡는 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세 번의 배낚시 경험이 있지만, 겨우 한 시간 남짓이었다. 그래서인지 쉽게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들었다. 또한 아이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라는 판단에 지경사에서 나온 문고판 <노인과 바다>로 한 번 더 산티아고를 만났다. 간간히 그려져 있는 그림이 조금 더 쉽게 스토리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노인이 알려주는 내면의 깊은 그림은 원작만 하진 않았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소년과 노인의 우정만큼은 원작 느낌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늙은 어부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참모습을 그리기 위해 200번 이상이나 고쳐 썼다. 그 노력으로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에게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안기는데 큰 기여를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899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평소 운동과 사냥 같은 거친 활동을 좋아했기에 1940년경부터 쿠바의 수도 아바나 근처에 거주하면서 바다낚시를 즐겼다. <노인과 바다>는 그런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나온 작품이다. 그도 그런 것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산티아고가 사는 어촌은 쿠바 연안의 바다이다.
어젯밤에는 <노인과 바다>를 영화로 만났다. 1958년에 만들어진 영화는 책에서 그려졌던 산티아고의 모습보다 건강하고 힘 있어 보이는 배역으로 인해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금 보기에는 엉성한 영상만큼이나 처음에는 몰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산티아고를 통해 인간과 바다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데는 어색함이 없었다. 영화를 한편 보고 난 뒤 다시 원작을 펴서 읽으니 세세한 글들이 그림으로 다가왔다. 그 덕에 더 깊게 산티아고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먼저 보던 책을 먼저 읽던 서로를 보완하여 내 삶의 일부로 고전이 들어올 수 있다.
<참고자료>
1.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인규 옮김, 문학동네
2.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원작, 김경혜 엮음, 유종호 그림, 지경사
3. 영화 노인과 바다, 존 스터지스 감독,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