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를 인정한다는 것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호언장담했다. 나는 전형적인 1 유형으로 완벽주의자이며 합리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 이제 나에 대해서 공부해 봤으니, 다른 유형 공부도 좀 제대로 해볼까?
마침 서울에서 에니어그램 심리상담사 자격증 취득을 위한 교육이 2주간에 걸쳐 진행된다기에 얼른 신청을 했다. 기왕 공부하는 거 상담사 자격증까지 딸 수 있다면, 더욱 제대로 공부하고 활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심리상담사라니 벌써 심리상담사라도 된냥 마음이 뿌듯했다.
이미 상담소를 운영하거나 운영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 20여분의 선생님들이 앉아계셨다. 용인에서 신촌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약 5분 정도 늦을 것 같아 강사님께 미리 문자도 넣어드렸다. 물론 여러 명이 모이는 교육에서 5분 정도 늦는 것은 여느 사람들에게는 예삿일이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전문가 냄새가 풍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판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열심히 받아 적으며 수업에 열중했다. 어? 그런데 이 수업은 몬가 다르다. 에니어그램을 교육하는 것은 맞지만 '성격강점 유형검사'라고 하는 에니어그램 PSI를 교육하는 곳이었다. 더구나 상담사 과정이라 상담이라는 실습 위주의 교육이 진행되었다. 실습을 위해 우선 우리는 PSI 검사부터 진행해야 했다.
검사를 진행하고 스스로 나의 유형에 대한 결과를 분석하고 있는데......
어라! 내가 3 유형?
검사지 결과로는 1 유형과 3 유형이 월등한 점수지만 동일한 점수가 나왔다. 한 번도 나는 내가 3 유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1 유형이 완벽주의자라면 3 유형은 성취욕이 강한 사람이다. 3 유형을 조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사회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인정되고 그러한 평가를 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를 향해 야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배우고 노력한다. 그래서 실제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인 동시에 행복해 보이는 이미지를 매우 중시하고 이를 잘 연출한다.
일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있다.
도전에 대해 낙천적이고 열정적이다.
리더로서 타인을 동기부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에니어그램 PSI 교육 중 발췌-
한마디로 이미지 메이킹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철저하게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다. 정말 내가 이런 사람일까? 의구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 한 주 교육이 끝났다. 다음 교육까지 자격증 취득을 위해 나는 이전보다 훨씬 유형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다. 그에 수반한 강점 유형까지도 달달 외워야 했다.
일주일 동안 나는 다른 유형보다는 3 유형에 깊이 빠져서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일주일 후 다시 진행된 교육에서는 서로서로의 유형과 강점을 판별해주기 위해 실습과정이 진행되었다. 나는 나와 너무도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1 유형의 선생님과 상담 실습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분과 나는 차이가 있었다. 1 유형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이분은 엄청나게 신념이 강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올라오심에도 항상 나보다도 일찍 와계셨다. 절대 늦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늦는 게 용납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늦을 땐 미리 연락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거였다. 나의 이미지를 위해서 나는 늦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늦는다면 매일 늦는다는 이미지는 심어주면 안 된다. 그래서 철저하게 도착시간을 계산해서 '5분 늦습니다.', '10분 늦습니다.'와 함께 죄송하다는 말을 꼭 도착 전에 전하곤 했던 거다.
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니 회사에서만 인정받는 것으로는 성이 안찼다. 회사에서 잘하는 것은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래서 책을 썼다. 책은 나를 빛나게 하는 수단이 되어주었다. 그냥 에니어그램 교육을 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따면 나는 심리상담사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생각에 더욱 혹 했던 것이 사실이다.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고 그 목표를 위해 전진한다. 책을 써야겠다 결심하고 나서는 원고 마감 D-day를 정하고 맞추었다. 물론 이 D-day 또한 같이 책 쓰기를 공부했던 분들과 함께 스스로 정했기에 그것을 어길 수 없었다. 나를 보고 있는 눈이 많았다. 그리고 이것도 경쟁이라면 질 수 없었다. 매번 내가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책을 쓰는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회사에서 이를 알게 되면 제대로 맡은 일을 처리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까 염려되어 인사평가를 받을 때까지 꾹 참았다. 인사평가는 11년 회사생활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미 책도 출간되었다. 그렇게 나는 작가라는 타이틀도 얻고 회사에서의 인정도 받았다.
심리상담사 교육을 받으며 내가 진짜 3 유형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 유형은 가슴형이다. 에니어그램에서는 자신의 유형을 찾는 핵심 열쇠로 '중심'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심은 장형, 가슴형, 머리형으로 나뉘는데 감정 중심이라는 가슴형이 나라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철저히 이성적인데 말이다.
가슴형인 3 유형의 특징은 이미지 때문에 남 앞에서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숨긴다고 한다. 그래서 눈물이 나도 남 앞에서 못 울고 숨어서 울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바로 나였다. 교육을 받을 그 무렵 회사는 인사이동 시점이었고 나를 포함하여 우리 팀 사람들은 부당하게 뿔뿔이 생판 다른 분야의 다른 팀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화가 나고 참을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누군가의 앞에서는 냉정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기 때문이다. 상사를 찾아가 울며 따지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나는 조용히 책상을 정리했다. 내가 충분히 화가 났음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눈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말 아이들과 집에 있는 시간 자꾸 나오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집을 나왔다. 지하주차장 차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차가 방전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두 시간을 숨어서 울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상대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언니가 나와 같은 3 유형인데 얼마나 재수 없는지 모른다고. 자신과 똑같이 하는데 언제나 언니만 돋보였다고 한다. 스스로 완벽해야 하는 1 유형의 사람이 보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는 3 유형의 이미지 메이킹은 재수 없는 것이었다. 상담사 과정을 진행하면서 조금 더 솔직하게 나를 털어놓았고,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에니어그램 검사 시 나는 1 유형과 3 유형의 점수가 동일하게 나왔다. 그리고 내가 1 유형의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럼 나는 왜 여태까지 1 유형의 사람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