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 찬 유리창 너머로
세상이 희미하게 번져 보인다.
안개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속 깊이 눌러 담아둔 감정이
김처럼 번져 오른 건지, 알 수 없다.
전화기를 붙잡은 손은
생각보다 오래된 기억을 쥐고 있다.
귓가에 수화기를 갖다 댄 이 자세,
참 오랜만인데,
몸은 어쩐지 그 감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휴대폰이 없던 시절.
우린 전화박스 앞에서 줄을 섰고,
동전을 쥐고 시간을 재며 서둘러 말을 건넸다.
울음을 삼키기도 했고,
고백을 하거나, 그저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 하나에도
마음이 쉽게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그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시절의 전화박스처럼
이젠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번호를
그리움처럼 꺼내어 눌러본다.
그렇게 오래된 나를 마주한다.
누군가를 서툴게 의지하던 나를.
조금은 여리고 솔직했던 그 시절의 나를.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