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의 아이였을까.
누군가의 딸이었지만 동시에 누구의 아이도 아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친부는 재혼해 두 아이를 낳았고, 엄마도 새 가정을 꾸렸다.
나는 외가에 남겨졌다. 서류상으론 가족이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한집에 살았고 등본 어디엔가 내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곳은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천덕꾸러기'라는 단어를 누구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나를 둘러싼 공기처럼 맴돌았다.
말 한마디, 발소리 하나에도 눈치를 보았다. 웃어야 할 순간과 말아야 할 순간을 먼저 배웠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보다는 참는 법을 익혔다.
초등학교 때였다.
학교에서 가족조사 과제를 받았다. 나는 외할머니 방 장롱 속에 있던 등본을 꺼내 펼쳤다.
이름 옆에 적힌 단어, ‘동거인’.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름 아래에 나는 가족이 아닌 누군가로 기록돼 있었다. 등본을 펼친 채 나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종이는 말이 없었지만 너무도 정확하게 나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게 꼭 함께 사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슬픔은 말하지 않고, 서러움은 미소로 감췄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내 마음 가장 밑바닥엔 늘 서러움이 깔려 있었다.
밝게 웃어도, 조용히 앉아 있어도 속에서는 늘 고요한 외로움이 흘렀다.
그 시절, 나는 학생생활연구소 앞에 붙어 있던 집단상담 포스터를 보았다.
별생각 없이 붙잡은 전단지 하나.
나는 그렇게 처음 상담실의 문을 열었다.
첫 번째 상담 선생님은 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두 번째 선생님은 내 감정을 분석하려 했다. 그러다 세 번째 상담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침묵을 깨고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그냥 누군가 들어주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렀다.
울 생각은 없었는데 참아온 무언가가 갑자기 터져버렸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말보다 먼저 다정해지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내 마음의 바닥을 들여다봤다.
상담실을 나서며 생각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이해나 해결이 아니라 그냥 외롭지 않다는 감각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