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의 작은 나에게] 시리즈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는 숨구멍 같은 공간이 있었다. 여고 앞, 수퍼 옆에 있던 작은 서점이었다. 서점은 크지 않았지만 창문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와 언제나 따스한 빛을 품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매대에는 참고서와 문제집들이 줄지어 있었고, 맨 끝자락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자리, 작은 탁자가 있었다. 그 뒤 책장에는 시집과 문학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그곳에는 책 냄새와 먼지, 그리고 사람 냄새가 함께 섞여 있었다.
‘큰아저씨’라 불리던 서점 주인은 키가 작고 말수가 적은 분이셨다. 하지만 문을 열 때마다 늘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맞아 주셨다.
그때 나는 문예반 활동을 하던 고3이었고, 늘 배가 고팠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보내주시는 용돈은 늘 조심스레 아껴 써야 했다. 나는 밥값을 아끼고, 그 돈으로 시집을 샀다. 가끔 서점 아저씨는 김밥을 내밀기도 했고, 풀어보라며 문제집을 건네주기도 했다.
서점에서 책장을 넘길 때면 늘 김광석의 노래가 함께했다. ‘일어나’, ‘잊어야 한다는 그 마음으로’… 그 노래들은 마치 내 마음을 먼저 읽고 다가오는 친구 같았다. 어느 날은 장사익의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는데 그 묵직한 목소리에 숨이 잠시 멎는 듯했다. 여고생에게는 낯설고 깊은 울림이었지만 그 울림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내 낯빛이 유난히 우울해 보일 때면 아저씨는 김광석의 ‘일어나’를 크게 틀어주시곤 했다.
중학교 때부터 나는 선생님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국어 선생님, 생물 선생님, 그리고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던 수학 선생님까지.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책 이야기, 학교 이야기, 요즘 마음들. 하지만 그 편지들과 통화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3 겨울, 담임 선생님이자 국어 선생님이 내게 시집 한 권을 선물해 주셨다. “좋은 시인이 되기를 기원하마.” 그 한마디는 오래도록 내 정체성처럼 남았다.
나는 책과 노래, 그리고 선생님들이 건네주신 한 문장에서 삶의 숨을 쉬었다. 학교 앞 작은 서점은 내게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조용히 문학가가 되기로 결심하던 나만의 작은 예배당 같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