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목록에서, 지금의 나에게로

by 권성선

연말이면 늘 새해를 계획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실하게 했던 일은 ‘읽을 책 목록’을 만드는 일이었다.
어떤 해에는 백 권이 넘는 책 제목을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마치 그 목록이 곧 나의 다음 해를 증명해줄 것처럼.

3년 전 오늘의 기록을 다시 보았다.
2023년에 읽고 싶은 책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니 백 권 이상이었다고,
한 해에 한 권의 책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기대된다고 적어두었다.
역행자에 나온 것처럼 내가 성장하고 싶은 분야의 책을 스무 권 이상 읽어보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읽음으로써 나를 키우고 싶었던 사람이다.
더 많이 알고 싶었고, 더 잘 이해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아직 쓰지 못한 나 자신을 책 속에서 먼저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나는 읽기보다는 쓰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책을 펼치기보다 노트북을 열었고, 밑줄을 긋기보다 문장을 만들어냈다.
누군가의 문장을 따라가기보다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자주 물었다.

읽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예전처럼 책이 ‘앞에’ 있지 않았다.
대신 내 안에 쌓여 있던 말들이 이제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미뤄두었던 이야기들,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지나온 시간들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제는 써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계획한 만큼 읽지 못한 해이자,
생각보다 많이 써버린 해가 되었다.
그 사실이 처음에는 조금 불안했지만 지금은 안다.
이건 방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는 걸.

다가오는 새해에는 다시 계획을 세우려 한다.
이번에는 읽을 책 목록만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의 목록, 이루고 싶은 장면들의 리스트를 적어보려고 한다.
버킷리스트라는 이름이 조금 거창하다면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약속’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모든 계획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목록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계획을 세운다는 건 미래를 통제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표시니까.

올해의 나는 쓰는 사람이었고,
내년의 나는 쓰면서 살아보려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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