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의 상태

by 권성선

결혼할 때 산 칼을 이십 년 넘게 썼다.

식칼이라고 부르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묻어 있었다.

갈아 쓰면 며칠은 괜찮다가 다시 무뎌졌다.

썰린다는 느낌보다는 눌린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마음 같아서는 좋은 칼을 사고 싶었지만

결국 다이소에서 식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값은 저렴했지만 손에 쥐었을 때 묵직했다.

괜히 오래된 칼을 배신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침에 그 칼을 처음 썼다.

야채를 썰고, 썬 야채를 칼날로 떠서 옮기려다 손을 베었다.

썰린 게 아니라 스친 것에 가까웠다.

칼날이 너무 서 있었다.


칼이 무서워졌다.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런데 방심한 순간, 또 손을 베었다.

몇 분 사이에 두 군데를 다쳤다.

칼날이 너무 무서워서 조심했는데 오히려 그 조심함이 손을 느리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칼날이 너무 무뎌도 문제였고 너무 서 있어도 문제였다.

무딘 칼은 힘을 더 쓰게 만들고, 서 있는 칼은 마음을 긴장시키게 만든다.

둘 다 결국 손을 다치게 한다.


요즘의 삶도 그렇다.

너무 무뎌진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썰 수 없다.

미루고, 눌러두고, 버텨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살면

작은 방심에도 상처를 입는다.

말 한마디에, 시선 하나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베게 된다.

좋은 칼이란 잘 드는 칼이 아니라 손에 맞는 칼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삶도 그렇다.

지금의 내 손에 맞는 날카로움. 너무 무디지도 너무 서 있지도 않은 상태.


아침에 밴 손을 바라보며 오늘은 조금만 힘을 덜 주고 조금만 경계를 풀고 살기로 했다

칼날처럼 삶도 가끔은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는 걸 이십 년 된 식칼과 다이소에서 산 새 칼이 함께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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