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오후,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다.
창밖으로 어떤 청년이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날카롭고 거친 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때 아들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저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지나갈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손을 멈췄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나는 소리를 먼저 들었고
아이는 마음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요즘 나는 자녀 양육에 대해 자괴감을 느낀다.
모든 부모들이 그러하듯 머릿속에는 늘 하나의 기준이 떠다닌다.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 남들 보기에 ‘잘 컸다’는 말.
그 기준에서 보면 내 아이들은 어쩌면 조금 비켜 서 있다.
일탈의 시기도 있었고, 사춘기는 꽤 오래, 깊게 앓았다.
한때는 집이 더 불안한 공간이 되기도 했고, 아이를 지켜보는 일보다
나 자신을 버티는 일이 더 힘들었던 날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뭘 잘못했을까’라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조금 더 단단하게 키우지 못한 건 아닐지,
조금 더 남들처럼 만들지 못한 건 아닐지.
하지만 빨래를 개다 멈춰 선 그 순간, 나는 다른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이 아이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는 한 사람을 보고 불편함보다 사연을 먼저 떠올릴 줄 아는 마음.
상황보다 감정을, 행동보다 이유를 먼저 묻는 태도.
그건 성적표에는 적히지 않는 능력이고, 입시 설명회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자질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늦게까지 남는 것이 무엇인지.
부모로서의 자괴감은 대개 비교에서 시작된다.
‘다른 집 아이들은’이라는 문장 뒤에 나와 내 아이를 세워 놓고
계속해서 줄을 긋는다.
하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 줄에서 이기는 일이 아니라
그 줄 바깥에서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 서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완벽한 부모가 아니다.
아이의 선택 앞에서 흔들리고, 불안해하고, 가끔은 남들 기준이 부럽다.
그런데도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내가 전부 실패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빨래는 다시 개면 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접히지 않는다.
아이는 아직도 자기 삶을 채워가는 중이고, 나는 아직도 부모라는 자리를 배우는 중이다.
다만 이제는 안다.
아이의 인생이 내 불안으로 재단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 아이가 누군가의 절규를 소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걸로도 충분히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