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엄마는 늘 ‘애틋함’이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외가에서 함께 살던 엄마가 새아빠와 분가하며 떠나야 했던 그때부터, 나의 세계는 엄마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으나 엄마의 빈자리는 늘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였다. 고등학교 유학부터 대학원,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타향을 전전하며 보낸 세월은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깊은 정서적 간극을 만들어냈다. 아주 각별하다고 말하기엔 서먹하고, 가슴 한구석이 아릿한 그런 관계.
그런 엄마의 허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척추 협착이 심해 핀을 여덟 개나 박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은 청천벽력 같았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수술을 견디기엔 엄마의 기력이 이미 바닥이었다. 결국 수술 대신 신경을 긁어내는 시술을 택했다. 병원에서 마주한 엄마의 뒷모습은 생경했다. 꼿꼿했던 세월은 어디로 가고, 펴지 못한 채 구부러진 허리가 그간의 고단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시술 후, 차마 엄마를 홀로 지방으로 내려보낼 수 없었다. 지난 토요일, 나는 엄마를 나의 집으로 모셨다. 그것이 우리가 30여 년 만에 온전히 함께 보낸 '60시간'의 시작이었다.
주방에 서서 엄마가 드시고 싶다던 음식을 준비했다. 정성껏 식사를 차리고, 입맛을 돋울 간식을 내어드렸다. 3학년 어린 나이에 엄마와 헤어지며 채우지 못했던 보살핌의 기억을, 이제야 내가 엄마께 돌려드리고 있었다. 텅 비어있던 시간의 공백을 따뜻한 밥 한 그릇, 다정한 과일 한 접시로 메워나갔다.
함께 있는 동안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처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마음의 조각들. 60시간이라는 숫자는 짧았지만, 그 속에 담긴 대화는 수십 년의 세월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굽은 허리를 보며 느꼈던 서글픔은 어느새 서로의 존재를 깊이 확인하는 충만함으로 변해갔다.
이제야 알 것 같다. 함께 살지 못했던 세월은 결핍이 아니라, 오늘처럼 서로를 더 극진히 보듬기 위한 기다림이었음을. 엄마의 굽은 허리는 아프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생애 가장 긴밀한 60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못다 한 마음을 다했던 이 시간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 그리고 엄마가 견뎌낼 시간 속에 가장 따뜻한 온기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