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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빛 Nov 01. 2021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읽고

에크하르트 툴레 'A New Earth'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는 원 제목이 'A NEW EARTH'이다. '새로운 지구', 이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저자는 외친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근대 서구 문명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거대한 신의 존재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여기서부터 인간은 각성하여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가족과 사회 속에서 인간은 문화, 학습 더 나아가 문명을 쌓았다. 이들의 축적과 맞물려 '나'라고 하는 에고가 생성되었다.
에고는 과거에 의해 조건 지워진다. 조건 지어짐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물과 구조이다. 장난감을 뺏겨 심한 고통 속에서 우는 아이의 경우 장난감은 내용물에 해당한다. 대상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은 에고의 지배를 받는 마음의 구조에 단단히 박혀 있다. 그 구조 중 하나인 동일화는 내가 어떤 것과 같아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속에서 에고는 나를 이루는 대부분에 관여한다. 나의 것은 물론이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나라고 하는 인격, 사회적인 지위, 가족과 친구와 같은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에고는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이다. 그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 속에 숨겨져 있는 힘이다. 에고의 주된 동기인 욕망이나 두려움 같은 정신적, 감정적 구조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 구조물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또한, 행위와 사건에 대한 반응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곳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각, 모든 욕망이나 두려움, 모든 행위와 대응이 허구의 자아의식을 갖게 된다. 이 허구의 자아는 '순수한 있음'의 단순한 기쁨을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 대용품으로 쾌락과 때로는 고통까지 추구하려 한다.

순수한 있음은 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알아차림을 통해서 온다.
에고의 성장은 모든 것들과의 동일화이며, 형상과의 동일화가 점점 뚜렷해진다. 에고는 자신의 확장을 멈추지 않고 탐욕스럽게 더 많이 요구한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죽기 시작할 때, 자신의 육체도 약해지고 영향력이 줄어든다. '더 많이'가 되어 가는 대신 '더 적게'로 되어 가며, 에고는 나날이 커져 가는 불안과 우울증으로 반응한다. 삶에 영향력을 미치는 대신, 삶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나의 세상은 축소된다.
이때가 의식이 형상과의 동일화에서 벗어날 기회이다.
늙음과 죽음이 행위보다는 있음에 있게 된다. 뭔가 일을 하고 생산물을 내는 것보다는 정주해서 가만히 있는 몸으로 시간이 길어진다고 느낀다. 행위보다는 있음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형상 차원의 것들은 잃지만, 본질의 차원의 것들은 얻게 된다.
새로운 지구에서는 늙음이 인간 개인의 의식이 꽃 피어나는 높은 가치를 지닌 시기로 인식될 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지고 에고에 삶을 지배당하지 않게 되면 늙음이나 개인적인 비극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축소되거나 붕괴되지 않아도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에 눈 뜰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하는가로 깨어있는 의식으로 바꿀 수 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의 변화를 위해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을 이행할 수 있다. 그것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이 셋 중 하나가 작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행동 방식으로 깨어 있을 때 이 행성은 새로운 의식을 일으키는 장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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