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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Jan 24. 2024

벙어리 장갑

감성 에세이11

[에세이] 벙어리 장갑

민병식


한파가 몰아닥치는 것을 보니 이제 겨울의 한가운데로 들어섬이 실감난다. 출근시간 아침 공기가 어찌나 차가운지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장갑까지 착용했음 해도 파고드는 한기를 이겨내기가 힘들다. 버스정류장을 서성거리며 한참을 추위와 씨름 끝에 출근을 했더 여직원 한 명이 벌써 와있다.


"어? 왜 이리 일찍 왔어요 추운데 천천히 오시지"


"눈이 와서요. 차가 밀릴까봐 일찍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다. 노란색 병아리같은 앙증맞고 귀여운 장갑이다. 노란 벙어리 장갑을 보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의 고향은 경기도 북부 휴전선에 가까운 곳으로 드센 강추위로 유명한 곳이다. 아무리 아궁이에 불을 때도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웃목에 놓으면 다음날 꽁꽁 얼어버릴정도의 추위였기에 겨울철 외출을 하려면 털모자와 장갑은 필수였고 혹시라도 맨 손으로 다니다간 매서운 바람에 손등이 다 터서 그 쓰라림에 따뜻한 물에 손을 담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어머니께서 털실로 손수 떠 주신 장갑이 노란 벙어리 장갑이었고 그것도 잃어버릴까봐 긴 줄로 짝을 연결하여 목에 걸고 다녔다. 그런데 나는 손가락이 제각기 들어가는 장갑을 끼고 싶었다. 왜냐면 친구들은 거의 모두 손가락장갑을 끼고 있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벙어리 장갑은 꼬마들이나 끼고 다니는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새 장갑 사줘, 친구들은 모두 손가락이 따로 들어가는거 끼고 있단 말야."


"내년에 사줄께. 장갑이 작은것도 아닌데 새 장갑을 뭐하러. 올해만 이거 끼고 다니고 내년에 사자."


한참을 뾰루퉁 해있다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나가는데 장갑끼고 가라며 어머니가 벙어리 장갑을 목에 걸어 주신다. 대문을 나서 골목길을 지나다가 갑자기 부화가 치밀어 장갑을 벗어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추운날씨도 잊고 친구들과 자치기놀이, 팽이 돌리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다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마루에는 아버지의 성난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이리와 앉아. 너 골목길에 장갑은 왜 버리고 갔어? 새 장갑 안사준다고 심술부린거지. 멀쩡한 장갑을 왜버려 임마!, 개가 물어 뜯어서 다 찢어 졌잖아. 넌 장값없이 겨울을 지내봐야 돼"


난 그날 아버지께 물건의 소중함과  절약정신에 더하여 한국전쟁 당시 당신의 고된 피난살이의 여정과 함께 생존의 어려움 등에 대해 한 시간이 넘도록 무릅을 꿇고 훈계를 들어야했고 그 해 겨울을 장갑없이 지내야만 했다. 지금생각해보면 벙어리 장갑이든 손가락장갑이든 따뜻하기만하면 될터인데 그땐 벙어리 장갑을 끼고 다니는 것이 너무 챙피했던듯 하다. 지금은 성인도 패션아이템으로 벙어리 장갑을 끼고 다닌다. 벙어리장갑은 착용한 채로 무엇을 집는다던가 할 때는 제약이 있지만 반면에 주머니 안의 손가락 들이 서로 살을 맞대가며 부비대는 정겨움과 따뜻함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료의 장갑을 보면서 떠올렸던 어렸을 때 끼던 벙어리장갑이야말로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고 따뜻한 장갑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어머니가 아들 손에 끼워주려고 대바늘에 사랑의 힘을 불어 넣고 털실에 온기를 더해 만들어 주신 그 장갑, 그 장갑에 스민 사랑을 먹고 자라서 지금의 내가 있음을 돌이키는 시간이다. 창밖으로는 흰 눈이 펑펑 내리고 벙어리 장갑을 끼고 눈사람을 만들던 어린시절의 그 겨울이 마냥 그립기만 한데 세월은 유수와도같아 꼬마였던 내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집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호통을 치시던 아버지는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불현듯 부모님이 뵙고 싶어진다. 가까이 살면서도 자주 잦아뵙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 뿐이었는데,  이번 주말에는 착용이 편한 따뜻한 털장갑하고 목도리를 사서 찾아뵈어야겠다. 혹시 그 때 그 일을 기억하시는지 옛 이야기를 나누며 오손도손 겨울밤을 즐겨보련다. 창밖은 점점 눈발이 거세지고 온 세상은 하얗게 고향의 추억으로 덮히고 있다.

사진 전체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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