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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Jun 29. 2024

길(路)위의 행복

마음 에세이

길(路)위의 행복

한결


얼마 전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보냈던 서울 이문동 옛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으니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인데 서울을 떠나 20년이 흐른 지금, 언젠가 한 번은 예전에 살던 곳을 꼭 들려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으나 쉽게 기회가 닿질 않다가 그쪽 방향에 볼 일이 생겨 내친 김에 가보게 되었다. 까까머리 청소년기와 꿈 많았던 청년 시절, 청춘을 그곳에서 보내고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지금 있는 안양으로 혼자 오게 되었는데 그때의 이문동이 서울 변두리이긴 했지만 2차선 도로가 정겹고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서울로 이주한 전국의 서민들이 많이 살았던 푸근하고 정겨운 동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께서 한 푼 두 푼 어렵사리 모아 장만한 우리 집은 그곳에서도 산동네 주택가 언덕 꼭대기에 있어 집에 가려면 크고 작은 골목길을 여러 개 지나야 했고, 하도 골목이 많아 처음 그리로 이사 갔을 때는 집을 못 찾아 헤맬 정도로 미로 수준이었다. 여동생은 그 언덕 골목길을 오를 때마다 종아리에 알이 밴다고 투덜거렸던 곳이고, 내게는 학교를 가든 외출을 하든 늘 통과해야했던 관문이었다. 사람 둘이 겨울 지나갈만한 골목길 벽에는 가난한 연인의 사랑 이야기도 쓰여 있고,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하여 뜻을 이루고자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도 쓰여 있으며, 또 밤을 새면서 일하는 근로자의 땀이 배어 있었다. 그 만큼 삶을 치열하게 살던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발자국이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영 옛 집을 찾을 수 가 없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이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고 예전 살던 집으로 가기조차 어렵게 구획이 틀어져 있어 방향감각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대로변을 따라가 골목길 입구를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아예 마을 전체가 완전히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동네 전체가 재개발이 되었으니 어디가 어디인지모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든다. 고등학교 시절 다녔던 독서실이며 마음씨 좋은 머리 벗겨진 사장님이 운영하던 빵집, 고등학교의 후배인 자신의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과일을 듬뿍 덤으로 집어주시던 마음씨 좋은 노점 아저씨의 미소는 이미 골목길 입구에서 사라져있었다.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거스를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다. 태백의 발원지에서 샘솟아 흐른 물이 계곡을 지나면서 돌을 굴리고 그 돌이 티격 태격 이지저리 부딪치며 낙동강까지 다다르듯 시간의 삶도 물살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환 앞에 잠시 경건해진다. 그러고 보니 영원히 살 것 아등바등 거리며 갖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에 집착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물질뿐만이 아니라 세상 적 지위, 인간관계, 심지어 남녀관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구 충족의 마음은 때론 욕심이 된다는 것과 그 욕심이 욕심을 낳으면 탐욕에 둘러싸인 흉물스러운 모습을 띤다는 것에 대해 예전에는 몰랐다. 그 누구든 잘 먹고 잘 살고 대우받으며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에 따른 자기만족이나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감사할 줄 아는 안분지족의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다. 늘 중심에 있어야할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고 살다가 결국 언젠가는 후회를 동반한다. 삶은 유한하고 지나고 보면 시위에서 당겨진 화살촉처럼 빠르다. 천 년 만 년 살듯해도 언젠간 내 손에 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할 때가 온다는 거다.


내 청춘이 함께했던 곳을 방문해서 옛 일을 떠올려 보니 그동안의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간 듯 한 느낌이다. 사춘기를 지나 청소년기를 보냈고 어른이 되기 위해 준비를 했던 제2의 고향 같은 곳, 그곳에서 되돌아본 나의 과거는 시행착오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치열했던 그 방황과 열정의 시간을 어찌 보냈을까. 아마 젊음이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 햇을 청춘 앓이, 그러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쉽게 결정을 못 내릴 듯하다. 젊음을 되찾는 청춘도 좋지만 힘들었던 부분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 보다 지금의 내가 더 행복하고 중요한 듯하다.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고. 비록 청춘이 아닌 중년의 나이 이지만 현재의 내 모습은 청춘 못지않다. 불같은 면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누그러뜨릴 줄 알고, 앞 뒤 돌아보지 않는 무모함보다 무턱대고 덤벼들지 않는 신중함도 있으며, 내 것이 아닌 것은 내려놓으려고 하는 중용의 덕을 조금은 아는 나이 아닌가.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진다. 황급히 비를 피해 급한 대로 전철 역위로 올라간다. 위에서 예전에 살던 동네를 바라본다. 고층 아파트가 흉물스럽게 삐죽 솟아있다. 한참을 서서 옛 집을 떠올린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입구와 옛 집 초록색 대문이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전철이 되어 머리속을 스친다. 골목길은 거미줄처럼 얽힌 내 삶의 흔적들이다. 골목길 따라 흩뿌려진 청춘의 기쁨과 열정, 고뇌 등 삶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밟으며 지금까지 걸어 왔다. 그 때의 꾸불꾸불한 골목길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삶의 길은  때론 힘든 오르막길도 있고 편하게 걷는 내리막길도 있을 것이며 복잡한 미로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 옛날 골목길의 풍경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의 낮익은 깨끗하고 정겨운 길이 있다. 옛 집을 떠나 지금의 집으로 가는 길, 푸르름이 하늘을 가득덮은 여름 풍경을 감상하며 앞으로 내게 남겨진 길이 어떤 길이든지 열심히 걸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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