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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Sep 07. 2024

가을

공감 에세이

[에세이]  가을

한결


한 낮은 아직 더위의 기세가 남아 있지만 그래도 한 풀 꺾인듯 보이고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이 가을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려한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맑은 하늘, 노오란 은행잎, 황금 들판, 울긋 불긋 하려한 단풍, 수북한 낙엽 등 아무래도 가을은 무엇이든 무르익는 계절이고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다보니 풍요로움이 먼저 떠오른다.


난 가을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대추와 밤이다. 지금은 남의 집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고향의 앞 마당과 뒷 뜰에는 배나무, 대추나무와 밤나무가 몇 그루씩 있었다.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이면  아버지와 함께 대추와 밤을 따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아버지가 밤나무 위로 올라가신다. 장대로 밤송이를 내려치면  성난 밤송이가 가시를 곧추세우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은 바닥에 나뒹굴고야만다. 그 다음은 내 차례다. 작대기로 밥 껍질을 까면 그 안에서 반들반들 윤기가 자르르나는 알밤이 나온다.  그 밤들은 까서 날밤으로 먹거나 삶아서 먹기도 하고 겨울에 연탄 불에 구어먹는 소중한 간식이 되었다. 반면 대추나무는 흔들기만하면 한꺼번에 우수수하고 붉은 대추가 떨어진다. 새콤달콤 대추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한 개씩 꺼내어 먹는 맛, 시골살이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즉석 간식, 입 안에 가을이 가득하다.


해마다 6월이 되면 밤나무엔 눈이 쌓인 듯 하얗게 밤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는데 꽃에서 남자의 정액냄새가 난다. 또 연구결과  정액과 비슷한 성분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밤꽃이 피는 시기에는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가고 과부는 근신했다고 전해지니 요즘 같은 양성평등시대에는 욕들어먹을 일이다. 또, 결혼식 폐백에서  며느리의 절을 받은 시부모가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뜻으로 대추와 밤을 던져주는데 이건 대추나 밤이 열매를 많이 맺듯이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고향의 집은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되어 무성히 풀만 자라 있는 집터만 남아있고 어린 시절의 밤나무, 대추나무는 흔적도 없다.  그곳엔 밤꽃냄새도 없고 그렁그렁 새빨간 대추도 없다. 그저 점점 옅어져만 가는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 나중에 나이가 들면 꼭 고향집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겠다는, 그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그리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살고픈 고향의 가을은 사라졌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세상에 밤나무와 대추나무는 없다. 꼬릿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나무만 있을 뿐, 그나마 그것도 다행이다. 아름드리 나무 대신  고층의 아파트와 높다란 빌딩, 높이 매달려 있는 광고판과 도로의 이정표가 나무를 대신하고 있고 공원에 가면 외국산 나무들이 빼곡하다.


요양보호사가 해주는 밥을 드시고 혼자 살고 계신 아버지, 요양병원에서 늘 집에가고 싶다고 보기만 하면 조르는 어머니, 부모님도 고향집의 밤나무와 대추나무를 기억하고 계실까. 고향의 가을이 생각날 때면 유명하다는 밤으로 이름난 어느 지역의 밤과 요즘 맛있다는 사과 대추로 그리움을 대신하곤 하는데 아무리 달고 맛나도 어린시절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넣고 다니면서 속껍질을 까다가 쓰디쓴 맛에 침을 퉤퉤 뱉어가며 까먹던 밤과 달콤 아삭한 고향의 대추맛을 따라갈 수는 없다.

동심의 세상에서 살던 그 시절, 밤과 대추가 그리 맛있던 이유는 간식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때마다 나무를 가지치기를 하고 애지 중지 관리한 부모님의 정성과 아버지와 함께한 밤따기, 대추털기의 재미있었던 시간들을 함께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가을이 서서히 익어가는  밤, 아버지께 전화를 드린다.


"이번 주는 어머니 외출을 일요일에 할게요. 진지 잘 챙겨드시고 잘 지내고 계셔요. 아픈곳은 없으시죠?"


"응. 지난 주 병원다녀온 뒤로 아픈데  없어. 일요일에 보자."


아버지 목소리에서 고소한 밤 맛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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