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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Sep 09. 2024

도당골

공감 에세이

[에세이] 도당골

한결


무척 어렸을 때 어머니 등에 업혀 다닐 때인데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이에도 뚜렷이 기억나는 일이 하나있다. 어렸을 적 난 몸이 무척 허약했다. 그때는 고향인 경기 연천의 현가리라는 지역에서 살았는데 병원은 커녕 약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사람 들이 아프면 지금으로 말하면 자격증은 없지만 야매로 주사를 놔주거나 침을 놓을 수 있는 동네 할아버지가 있을 뿐이었고 가정 상비약은 요즘의 말이지 그때는 집에 변변한 진통제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칠흙같이 깜깜했던 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얇은 담요를 머리까지 덮어쓰고  산등성이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 어느 허름한 집에 도착해 어느 엄청 무섭게 생긴 아저씨에게 엄청 큰 주사기로 엉덩이 주사를 맞았다는 것이고 엄청 아팠다는 것이다. 그 외에 왜 갔는지 그곳이 어딘지  집에 언제 돌아왔는지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어보니 내가 간곳은 도당골이라는 골짜기위에 있는 산이 었고 그 산에는 옛날에 군대에서 의무병을 했던 아저씨가 살았는데 미군부대에서 약을 구해 환자들에게 주사를 놔주는 의원역할을 하던 곳이란다. 도당골이란 곳은 조선 개국 초 고려의 신하 이양소(李陽昭, 367∼?)라는 분이 숨어 지냈던 곳인데  그의 높은 지조를 후세 사람들이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자연과 벗삼아 살았던 중국의 유명시인인 도연명에 비견할 만하다 하여 도연명이 은일한 곳인 '도당’에서 뜻을 따와 도당동이라 이름지었고, 조정에서 내려준 그의 시호인 ‘청화’에 연유하여 청화동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며 한국전쟁 전에는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마을이란다. 아버지께서 어린 시절 조부모님과 살던 집터가 왜 도당골 근처에 있는지 알게되는 순간이다.

당시에 도당골에는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깨비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나무와 수풀로 우거진 밀림같은 곳을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던 밤에 그것도 여자의 몸인 어머니 혼자서 그 곳을 올라간 것이다. 그날 밤 난 열이 너무 올랐고 약도 없고 아무리 벗겨놓고 몸을 닦으며  열을 내리려고 해도 열이 떨어지지 않고 밤새 울기만 했다고 한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하필이면 그 날숙직이었고 어머니 혼자 나를 들쳐 업고 그산길을  올랐다고 한다.


나는 기억한다. 상당히 멀고도 가파르던 산길을 날 업고 숨가쁘게 오르던 어머니의 용기를,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쳤던 그날 밤의 장대비를,  너무 무서워 어머니가 덮어준 그 천조각 안에서 어머니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이고 있었던 그 두려움의 시간을, 어머니의 거친 숨과 우거진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 들이 그 아저씨 방문해 치료를 받았고 감기약 하나 제대로 없던 시절에 아저씨가 놔주는 '페니실린'은 특효약이었다.


어머니도 이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계신다. 그날 비도 엄청오고 깜깜힐 밤, 혼자 산길을 가야하는데 너무 무서워 심장 멎는 줄 알았다고 하시며 너무 열이 나서 아들 잘못될까봐 그 두려움을 참아내며 가셨다고 한다.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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