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여름 내내 내렸던 열대성 스콜 같은 비가 아닌 한 방울, 두방울, 셔츠의 깃을 두드리며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푸르디 푸른 가을 하늘을 못 보는 것이 아쉽지만 바깥은 선선한 기온으로 다닐만한 날이 되었다. 너무 무더웠던 여름과 작별 인사가 꽤나 오래 걸린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세상을 적신다
한 밤의 열대야 함께 밤을 새던 모기와도 서서히 헤어질 준비를 하고 오랫동안 바깥 세상구경하고 싶어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옷장 속 가을 옷들이 어서 나가자고 재촉하며 바깥 나들이 준비를 한창 하고 있겠다.
빗방울 하나에 몸이 젖고 둘에 마음이 젖고 빗방울 셋에 나무가 젖는다. 이 비가 그치고나면 코스모스 활짝 피어나 가을 빛이 짙어지려나 나뭇잎이 아쉬움 가득 내년 여름을 기대하며 서운한 미소로 조금씩 물들어간다. 투둑 투둑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여름이 가을을 부르는 소리이며 나뭇잎에 가을이 물드는 소리다. 가을 비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결실을 맺고 열매를 거두어 겨울을 준비하라는 급하게 재촉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는 무언의 신호다. 봄 비가 겨울 내내 잠들었던 깨우는 생명의 비라면 가을비는 휴식을 준비하고 또다른 출발을 준비하라는 토닥임이다.
나무들의 초록에 가을 빛이든다. 거리를 나선다. 공기가 참 좋다. 드디어 비가 그쳤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면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그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이 운치를 더한다. 천천히 길을 걷는다. 햇살로 온몸을 샤워하듯 따뜻함이 몸을 감싸니 행복해진다. 햇살은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하늘을 본다. 거울 같은 맑음, 청명한 하늘 위로 휴일의 조각조각 시간들이 새털구름을 타고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락함이 주는 시간 위에 나를 맡긴다. 구름을 안는 상상을 하며 눈을 감는다. 잠시 후 나는 코스모스 무리 지어 핀 꽃밭에 누워 두 팔을 벌리고 누워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꽃향기가 폴폴 솟는다. 얼굴에 분홍빛이 물들기 시작하면 몸 전체로 번져나가는 빨갛고 하얀 빛깔의 일렁거림이 물결을 치고 나는 그 사이를 새처럼 날아다니며 향연을 즐기다 어느 순간 부드럽고 따스한 가을의 어느 한곳에 내려앉아 떨어진 꽃잎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햇살, 바람이 찾아왔다. 한참 수다를 떨 무렵 어디서부터인가 모르게 이야기의 꼬리를 놓치고 잠에서 깬다.
천천히 시간은 사유의 노을을 향해 이동을 하고 날이 어스름해질 무렵 눈을 뜬 공원으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려볼 참이다. 봄날과 여름을 지내온 잎들의 숨결이 사복 사복 발의 감촉을 통해 가슴까지 숨결로 다가오고 한 잎 두 잎 바람을 타고 가을을로 맞는 무수한 작별의 편지를 받는다. 봄이면 새로운 싹의 모습으로 다시 오겠다고, 바람을 등진 채 떠나가는 나뭇잎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얼마 안 있으면 오자마자 곧바로 시간의 흐름에 자리를 내어주고 떠날 가을을 마음 한 켠에 가득 담는다. 이토록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소박한 풍경 속의 노을과 낙엽의 하모니, 마치 숲 속 오솔길을 걷는 듯 느낌을 얻은 기쁨, 오늘의 산책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는 가을을 거닐며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마음의 여백을 찾기 위해서 근육통 같은 삶의 고단함을 일부러라도 내려놓고 계절이 주는 한가로움에 빠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오늘이 지나자마자 바로 내일로 들어가야 하는 삶을 사는 시대, 문이 열리면 승객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출근길의 무표정한 지하철 출입문 같은 삶에 밀리지 않고 가끔은 의도적으로 느림에 빠져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딱딱한 마음도 조금은 더 부드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나무 들이 잎을 떨구어 내며 겨울을 준비하는 시간이 시간이 가을이다. 삶의 무게를 잔뜩 짊어진 도시는 피곤함을 잊으려 하나 둘씩 불을 밝힌다. 가을은 서두르지 않고 내게 햇살의 감촉과 저녁 무렵의 선선한 내음과, 다가올 추위를 준비할 시간을 선물한다. 앞선 계절부터 차곡차곡 써내려간 편지를 전해주는 가을이 고맙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을이 전하는 행복의 마음을 배달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이런 날 바닷가를 찾는 것도 좋을 듯싶다. 바다의 비릿함이 삶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줄 듯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불현듯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이 있을 것이다. 무게야 어찌하든 간에 조금은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 반복 되는 삶의 고착화는 답답함을 동반하고 탈출구가 필요할 때 이렇게 좋은 날을 핑계 삼아 짜여진 틀을 찌그러뜨리고 무작정 떠나고 싶은 마음에 더해 누군가 편안한 상대가 곁에 있어도 좋겠다. 함께 여행하고 싶은 사람, 아마도 가을을 함께할 상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좋은 계절이 주는 설렘을 함께 하고 싶은, 그래서 더욱 행복해지는 마음을 나눌 그런 사람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모래사장을 거닐며 함께 있음으로 그 말이 더 좋아지는 오늘이 주는 소중함을 같이 공유할 수 있다면 행복은 배가 될 것이다. 바쁜 일상에 매여 돌아보지 못했던 마음에게 휴식을 주고 파도의 아주 미세한 출렁거림에 평안을 느끼고 조그마한 시간의 조각으로 헤어진 마음의 틈새를 메꾸려고 할 것이다. 그 것이 아니라면 소중한 것 들을 잊고 사는 것이 얼마나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던가를 푸념을 늘어놓으며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이니 삶과 죽음, 계절의 순환 이런 모든 것들이 생성과 소멸의 당연한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늘 나와 함께 있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분노, 희망과 절망 모든 것 들은 흐르는 것이다. 봄이 오고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또 봄이 오듯이 우리 삶의 날씨 또한 계속 가고 올 것이다. 일기예보에서만 날씨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늘 우리는 매일 매 시간 스스로의 날씨를 만든다. 매일 춥고, 매일 흐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같이 가을 하늘같이 청량한 날도 있을 것이다. 이 가을, 주름 잡힌 이마가 펴지고 처진 입술로 인상 쓰는 것을 멈추고 가고 옴의 이치 속에서 삶에 지쳐서 나도 모르게 점점 옹색해지는 마음을 행복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음과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 잎이 돋아날 수도 있음을 알고 소멸하고 다시 생명이 되는 자연의 언어 들이 가슴을 붉게 물들이는 계절, 그저 오늘을 오롯이 행복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