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답지 않게 세차게 흩뿌려 대더니 오늘은 또 언제 그랬냐는듯 맑은 날씨다. 티 하나 없이 맑은 파란 하늘을 보니 가을이 오긴 오려나보다. 어머니 외출시키러 요양병원 가는 길, 여름내내 초록을 뽐내던 플라타너스 커다란 낙엽들이 도로가에 수북이 쌓였다. 이러다가 어느 날 문득 나무를 쳐다보면 그 많던 잎들이 다 떨어져 있을테고 비로소 우두커니 빈가지만 남은 나목의 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여름내내 더위를 가려주던 초록잎이 아직은 많이 달려있지만 이미 곳곳엔 갈색의 낙엽으로 순환되어 다시 찾아올 봄을 위해 사라질 준비를 차차 하고 있는 중이다.
가을은 숭고한 계절이다. 난 가을을 맞이할때야 비로소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봄과 여름이 생성과 번창을 의미한다면 가을은 완숙과 마무리, 겨울은 소멸과 생성의 준비를 상징한다. 한창 피어난 봄 꽃과 신록 우거진 나무가 울창한 이파리를 하나 둘 떨궈내고 적막하고 온화한 쉼을 위한 시간을 맞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연 앞에 세상 앞에 겸손해진다. 바람이 온몸을 선선하게 훑고 지나간다. 어느새 가을이 내곁에 와있음을 느끼는 시간, 이렇듯 가을은 서둘러오지도 않고 요란하지도 않다. 마치 발 뒤꿈치를 들고 살금 살금 다가와 언제와있는지도 모르게 내곁에 가만히 앉아있는 친구같다.여름의 뜨거움과 겨울의 차가움 사이에서 적막의 시간을 제공하는 가을엔 매 순간이 조용함과 평온함으로 고요하다.
가을은 중년의 계절이다. 낙엽을 보며 나의 삶도 가을처럼 익어가고 있는 듯한 계절과의 동질감을 맛본다. 세상은 늘 바쁘고 어지럽다. 사계절의 순환을 제대로 느낄 사이도 없이 시멘트 벽과 네온사인 사이에서 늘 똑같은 일상으로 눈 돌릴 틈 없이 계절의 변화를 보낸다. 낙엽을 태우는 향기를 맡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본 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벌써 은행 열매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금 있으면 사람이 없는 인도는 은행 잎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헤드라이트를 켠 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도 은행 잎 몇 개를 꼬리에 달고 겨울을 향해 달릴 것이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가을은 겨울을 준비한다. 거리에 쌀쌀한 바람이 불어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는 겨울잠을 잘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면 나무는 봄, 여름, 가을을 거쳐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이제 다음 해의 봄을 위해 쉴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쉴 틈이 없다. 조용한 이 계절에도 바빠져서 고독과 추억을 노래한다. 감정이 풍부해져서 그런지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은행나무와 단풍잎에게 사치스런 고독을 떠넘긴다. 말라 비틀어진 낙엽이 한 장 떨어져 바람에 날려가는 모습에 괜히 쓸쓸함과 외로움을 실어 눈물이 나는 계절로 만들곤 하니까 말이다.
모든 곡식과 과일이 여무는 수확의 계절 가을은 노랗게 익어 고개를 숙인 벼와 나무에 풍성하게 매달려 탐스럽게 익은 과일과 열매를 겸손한 마음으로 수확하여 겨울을 준비한다. 그러니 가을은 추운 겨울을 나게 해주는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감사가 없는 삶에는 겸손이 없다. 봄이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고, 여름 가뭄에 물을 공급하고 태풍에 쓰러지지 않도록 돌보고 병충해가 들지 않도록 방충 작업을 한 노력 끝에 늘 애지 중지 키운 작물이 가을에 열매를 열듯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보살피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정성 없이 기른 나무에 열매가 얼마나 열릴까, 정성을 들이지 않는 나무는 주변에 잡초가 자라고 칡뿌리가 뻗어 나무까지 고사시키고 말 것이다.
가을로 다가가는 입구에서 나의 마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치고 힘들 때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낙엽 태우는 냄새를 지금까지 삶의 의욕을 북돋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썩어 거름이 되는 당연한 계절의 순환 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중년의 삶은 가을과도 같다.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고속열차보다 빠른 세상 속의 달리기를 멈추고 코스모스 가득 피어있는 시골 마을의 간이역 같은 풍경으로 살고 싶은 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으며, 길가의 나무 하나, 꽃 한 송이앞에 멈춰서서 대화를 건네어 본다. 봄과 여름을 지나 따뜻한 겨울을 준비하기 위한 평온한 가을처럼 감사와 겸손의 마음으로 모든 것에 순응하며 살으라고 나뭇잎 하나가 팔랑거리며 편지를 전한다. 은행잎, 단풍잎 노랗고 빨갛게 물들기 전에 내가 먼저 단풍에 물들어 볼까. 다음 주말에는 가을빛 스웨터 한 장 사러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