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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an 16. 2021

처음 읽는 일리아스 / 독후감125

호메로스

 인간과 신이 혼재하고 소통한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사는 세상은, 내가 아는 세상에서는 인간은 신에게 소망하고 신의 응답은 너무나 소원疏遠하지만, [일리아스]에서는 신과 인간이 소통한다. 심지어 인간이 찾기 전에 자신의 의지로 인간사에 관여한다. 이것이 여기서는 일반적인 상황이다.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일리아스’는 ‘일리온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일리온은 트로이의 다른 이름이다. 트로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트로이의 목마’의 그 트로이 맞다. 그러므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트로이의 이야기, 더 정확히는 트로이의 참담한 멸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편 올림포스에서 측은한 마음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제우스는 자신의 아들 사르페돈이 곧 죽을 것임을 깨닫고, 아들을 낚아채어 안전하게 뤼키아로 데려가야 할지 말지 괴로워했다. 그러나, 헤라가 그를 나무라며,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르페돈의 운명은 오래전에 정해졌으니, 만일에 제우스가 이런 식으로 개입한다면, 다른 신들도 제 자식들을 위해 똑같이 하기를 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싸움을 지켜보며, 필연의 운명을 제지할 힘이 없어, 아들의 명예를 높여주고자 핏빛 빗방울을 내려 보냈다.


 제우스는 신과 결혼하여 신을 낳기도 하고, 사람과 혼인하여 인간을 후손으로 남기기도 한다.

아무리 천하의 제우스라 해도 자기 자식의 죽음으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 신도 그렇고 인간도 모두 가족과 핏줄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일들은 계속 일어나기 마련이다. 신화 같지 않은 신화 같은 이야기가 [일리아스]이다.



 누가 [일리아스 ILIAS]의 원작자인가? 호메로스 HOMEROS 아녔던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기원전 8세기경에 쓰인 24권, 1만 5,000행으로 쓰인 시이다.

눈먼 방랑시인 호메로스는 구체적인 사람이라기보다 전설적인 인물이며, [일리아스]의 언어는 순전히 시적인 언어 형태로 늘려진 여러 먼 지방의 방언들로 이루어진 인위적인 시적 창작물이라고 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언어는 한 사람이 창조한 것일 수 없으며 수백 년의 간격을 두고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시인의 생산물이 아니라, 시의 전통이 생산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작품 내에서 더 낡거나 더 새로운 낱말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방랑시인들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세대가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관한 이야기를 말로 정리하다가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형태에 이른 것일까? 호메로스라는 이름의 뛰어난 방랑시인 단 한 사람이 후세를 위해 윤색潤色하여 대작을 기록하기 위해 적어 두는 방법을 배웠던 것일까?



 전쟁은 단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빼앗았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스파르타를 후원하는 모든 국가들의 장수와 군대는 배를 이끌고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트로이를 공격하고, 이에 맞서는 트로이를 후원하는 모든 국가들의 군대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 신들도 개입하고, 신들도 편을 골라 인간들과 함께 싸운다. 공격하는 스파르타 영웅은 단연코 아킬레스이며, 이에 대적하는 트로이 장군은 헥토르이다. 전투에서 절친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아킬레스는 헥토르에게 잔혹한 복수를 한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전부 다 그리거나 아킬레스의 일생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다 그리려 하지 않고, 시인은 전쟁의 매우 작은 단편, 아킬레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잃기 직전과 직후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일관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읽기 겁먹었던 [일리아스]를 드디어 읽었다.

평생 인간세상에 살았으나 이번 주는 신들과 함께 사는 한 주였다.

신들과 함께하는 세상. 기도하면 신께서 바로바로 들어주시는 세상. 삶이 신과 함께하는 세상. 정말로 이럴 수 있다면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지는 않을까?

신과 함께했던 한 주가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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