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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May 08. 2021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독후감141

 보는 만큼 보이는 것은 당연할 진데 보려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보는 것이 힘들어 또 미술책을 집어 들었다.

‘미술을 어찌 배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런 책 저런 책 뒤집어보다가 계속 고민해보고 계속 책들을 찾아보고 훑어본다. 조금씩 무언가 쌓이는 것인지 접한 만큼 갈팡질팡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무언가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다.

풍속화도 갔다가 초상화도 갔다가 산수화도 가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다못해 연적 (벼루에 먹을 갈 때 쓰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에도 풍류가 있고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끝없는 이야기 중에 한 문장 얻어간다.

‘미술은 문학보다 스펙터클하죠. 그게 이해가 되든 안 되든, 한눈에 강박적으로 달려드는 속성이 미술에 있다는 말입니다. 관념이 아니라 시각적이고 구체화된 방식으로 펼쳐지는 세계죠. 문학처럼 행간을 읽을 짬도 없이 이놈은 즉물적으로 덤벼듭니다. (중략)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왜 떠드는 걸 주저하는 걸까요. 저는 작가의 그림 그리기와 감상자의 그림 읽기가 서로 달라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이건희 컬렉션’이 핫하다.

그중 프랑스 인상주의 화풍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모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니!! 

모네가 자기 집 자랑을 하려고 그린 그림이다. 인상파 화가치고 일본 판화에 반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사실 반 고흐, 폴 고갱, 에두아르 마네 등등이 모두 친일파였다. 모네는 아예 자기 집을 일본인 정원사에게 부탁해서 꾸미기도 했다. 모네가 정원을 만들 때 동네 아낙네들이 들고일어나기도 했는데, 동네를 통과하는 센 강의 지류를 정원 쪽으로 틀어버리자 아낙들이 빨래할 물이 줄어 들어서 였다. 그래서 동네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네는 농부 차림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정원 짓는 걸 막았다면 우리는 모네의 그림을 볼 수 없었을 수도.


 1998년 5월은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달이다.

그는 그해 5월 12일과 13일 연이틀 뉴욕의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장을 오가며 장외 홈런을 날렸다. 먼저 12일 크리스티 경매장. 이날 워홀의 경매작 [자화상]은 224만 달러 (당시 20억 원 이상)를 부르고 나서야 호가가 멈췄다. 하루 뒤인 13일 소더비, 워홀이 1964년에 제작한 [오렌지 마릴린]의 낙찰가가 불려지자 응찰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1,730만 달러! 193억 원!!

 우리의 기를 팍 꺾어놓을 거액의 달러를 아낌없이 쓰게 하는 그 구매 촉발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바로 욕망이다. 그 욕망은 사람의 욕망이자 세상이 갈구하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이 투사된  지점에 가 닿고 싶은 또 다른 욕망이다. 그것이 워홀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리즈 테일러, 말론 브란도, 마릴린 먼로, 워렌 비티, 그리고 마오쩌둥… 거기다가 미키 마우스까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최초 추상 수채화인 [무제]를 발견하게 된 계기는 너무 솔직하다. 서너 해 전부터 칸딘스키는 작품이 제대로 안 풀려 고민이 심해서 하루는 화필을 냅다 던지곤 산책을 나갔다. 맑은 정신을 무장해서 다시 작업실에 들어서는데 기막힌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형태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데 순수한 색채만으로 이루어진 조형 세계가 그 그림에서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누가 이런 기이한 작품을 내 작업실에 두고 갔을까’ 실수로 옆으로 돌려놓은 자기가 그린 그림이었다는.

 그림이 전달을 목표로 했다면 문학에 일찌감치 자리를 내주었을 것이다. 작품에서 선과 면과 색과 형태는 그 자체로 발언한다. 그의 다른 작품인 [푸른색의 원]에선 어떤 선은 날카롭고 또 다른 선은 보들보들하다. 삼각형은 균형을 말하고, 유전 물질처럼 꼬인 나선은 반향을 자아내며, 엇갈리는 곡선은 서로를 떠받친다. 칸딘스키는 형태를 그리되 외관이 아니라 정신을 그린 화가다. 잘 모르겠고, 이해하기 힘들다. 그림은 그림으로만 보라고 감상자를 질책한다. 이해하려 애쓰기보단 그림으로만 즐기라는 의미인 듯하다.




 그림을 바라보고 즐기며 음미하는 자체가 제일 중요하고 정석이지만, 글로써 그림을 바라보고 즐기고 음미하는 것도 좋다. 그림의 흔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림과 함께 있는 글이라서 글 안에서 그림을 보는 것 같고, 그림 속은 책 같다.

 작가의 글솜씨가 여간 아니다.

작가의 글에서 어디선가 소설가 김훈의 냄새를 맡았다. 책의 말미에 김훈이 에필로그를 적었다. 그림과 글 또한 상통한다. 그림을 알고 싶어 글을 읽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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