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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May 29. 2021

적과 흑 /독후감144

Stendhal : Le Rouge et le Noir

불륜! 간통! 인간 삶에서 이만큼 흥미로운 단어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목수 아들로 신분도 재산도 없지만 능력 있고 야심 찬 젊은이가 출세를 위하여 사랑을 배신하고 정략적인 결혼을 하려다 파멸을 맞이하는 쥘리앵의 첫 번째 직업은 레날 시장 집안의 가정교사이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져 살며 어마어마한 집안 살림에 골몰하며 사랑의 열정이라는 것을 그저 복권을 생각하듯 분명한 속임수이며 어리석은 자들만 좇는 행복으로 알아왔던 레날 부인은 쥘리앵과 바람이 났다. 여기서 쥘리앵은 더 이상 목재소에서 얻어터지고 매를 맞으며, 집에서는 모든 가족에게 멸시를 받았던 시절의 쥘리앵이 아니다.

 더구나 이제는 당연스럽게 레날 부인의 손을 잡기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1830년 즈음 이 시대에 쥘리앵이 대단한 것은 자신의 공상과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마음껏 즐길 줄 안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격이 상류층 부인에게 호감을 주지 않았을까?

 사람의 1) 감정은 홀로 거대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2) 허영과 3) 교만은 셀프로 부피를 키운다.

3가지가 적절하게 혼합되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쥘리앵과 레날 부인의 감정과 표현은 항상 다른 높이에 있어서 이 단차段差가 둘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애틋하게 만든다.

 [적과 흑]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 마음이다.

불륜이건 진정한 사랑이건 그렇게 맹세를 하고 그렇게 다짐을 하고 속삭이며 애무했건만 상황만 바뀌면 자신의 마음조차 믿지 못하며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계속 마음이 변하니 생각이 변하고 작가 스탕달에게 글로 쓸 상황과 글 재료들은 줄줄이 넘쳐난다. 변하는 사람 마음은 최고의 글 거리가 된다. 


 [적과 흑]의 매력은 작가의 출현도 한몫한다. 자신의 소설에서 작가가 출현한다고?

글을 읽다가 갑자가 스탕달은 글 밖으로 나와 객관적인 시점을 가진 제삼자로서 이야기한다. 자신이 작가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너무나 소설에 몰입이 된 것일까?

 ‘쥘리앵이 이 독백에서 보인 약점을 보고 나는 그에 대하여 보잘것없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혹은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시기 쥘리앵의 삶에 대하여 명백하고 정확한 사실을 너무 적게 쓰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등등 책의 곳곳에서 작가와 지나칠 수 있다.



 이렇게 레날 부인과 헤어지는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렇게 맘고생을 하며 불륜을 저질렀는데. 이렇게 쉽게 쥘리앵은 레날 부인과의 관계를 그만두고 신학교로 가다니!! 내가 너무 소설에 빠져들었나?

 사랑에 대해 방심하면 안 된다. 사랑은 금방 사람 마음의 빈틈을 찾기 때문이다.

신학교 이후의 쥘리앵의 활약은 독자가 무엇을 기대했건 기대 이상이다. 이후에는 라 몰 후작부인의 딸인 마틸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작에는 매력적인 주인공 쥘리앵의 특장점을 부각해야 한다.

쥘리앵은 파리에 오게 되면 모든 것에 감탄하는 다른 시골뜨기 청년들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증오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지만 이 청년은 그렇지 않다. 바보들이 오히려 이 청년을 바보라고 여기고 있다.

 마틸드도 이에 못지않다. 그녀는 개성이 없는 것을 싫어했다. 마틸드는 한없이 드높은 자존심을 지닌 여자이다. 쥘리앵의 사랑고백은 매우 솔직하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그의 말이 일순간에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마틸드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자 그를 철저히 경멸했다 

이렇게나 사람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 것이 정상일까 할 정도로 막강한 두 개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될 수도 있겠지만 쥘리앵과 마틸다 둘의 감정 셔틀은 대단하다.

넘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과연 있을까 하다가도 당연히 나를 사랑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나에게 굴복하는 것을 당연시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 머리를 조아리며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할 수 없어 상대방을 마음에서 밀어내기까지 하는 한시 앞도 알 수 없는 사랑의 기브 앤 테이크는 끝이 없다.

왜 [적과 흑]을 고전이라고 하는지, 왜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지, 왜 다시 고전을 읽고 싶게 만드는지 스탕달의 작품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얻은 대혁명의 변혁을 무화시키며 과거의 신분제가 다시 고착되어가는 [적과 흑]의 배경이 되는 왕정복고 시대는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망명 귀족들이 다시 집권하여 옛날의 특권을 되찾은 뒤 그것을 다시 잃게 될까 불안해하며 쥘리앵과 같이 교육을 받은 하류 계층 젊은이들을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던 시대이다.

 200년 전의 소설은 읽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이 시대 자체가 편리하게 나폴레옹 이전과 이후로 편리하게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시대 배경으로부터 주어진 사람들의 생각을 스탕달은 놓치지 않고 적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적었고, 어쩌면 자신들도 모르거나 숨기고 있는 마음들을 적었다. 붉은색과 검은색은 각각 그 시대의 이념을 대표한다. 그래서 [적과 흑]은 고전이고, 명작이다.


 레날 부인을 죽이기 위한 저격에 실패하고 지하감옥에 수감된 쥘리앵은 과거 자신의 욕망을 단죄하고자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부르짖고 있다. 또한 예전을 회상하며 현재를 후회한다. 삶의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야심을 채우기 위한 레날 시장 집안의 가정교사 시절이 행복했었다고.

사랑과 불륜의 이야기들은 이 부르짖음을 흥미롭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쥘리앵의 부르짖음은 사실 현재와 다르지 않다. 

200년 전과 바뀐 것이 별반 없다고 한다면 스탕달 씨의 기분은 어떨까? 또 한 명의 현대판 쥘리앵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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