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성원 Jul 03. 2021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독후감149

 제목이 낯익은 책인데 펼쳐 보질 못했다.

책을 펼치기 전 무엇을 기대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뜻밖의 상황이 펼쳐진다. 한국 미술에 대한 책을 펼쳤으나 흡사 글솜씨를 가르치는 책으로 혼동된다. 글을 배우는 책일까? 한국 미술을 배우는 책일까?


“순한 버섯처럼 산기슭에 오종종 모여서 돋아난 의좋은 초가지붕의 정다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해줄 때가 있다.”

내 나라의 글로 적은 내 나라의 풍경과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는데 너무나 새롭다. 현재의 광경은 아니지만 한국인이라면 마음속에 담고 있을 이미지인데도 글로 접하니 다시 새롭다.

 책을 읽으며 밑줄도 볼펜으로 그을 수가 없어서 먹을 갈아 붓으로 밑줄을 그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만년필을 꺼내 밑줄을 긋는다.




 글로써 한국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책이다.

아름다움 중 마음에서 인정하고,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으리라!

‘꼭 표현하지 않아도 느끼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막상 표현하는 와중에 아름다움은 배가倍加된다.

자신이 직접 표현하기가 어렵다면 타인의 글을 통해 머릿속에 자물되는 아름다움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하는 글이다.



 글의 참 멋은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단어 쓰임 하나, 한자어 쓰임 하나, 문장 구조 하나하나가 한국인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기저에 깔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멋을 찾을 수 있게 한다. 한국인의 핏줄이 글과 만났을 때 무엇인가 몽글몽글 가시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한국의 미는 감히 말하건 데 외국의 범인凡人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조선시대 화가 중 창강滄江 조속의 그림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글이 있다.

“그의 작품은 화면의 밀도가 모자라는 느낌이 있는 반면 야취野趣가 높고 색감이 매우 담소해서 마치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담담한 감각의 세계를 맛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표현을 과연 어떻게 영어로 작문할 수 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나전칠기 소나무대나무무늬 빗접 (머리손질 도구 보관함)에 대해 “치기가 있어 보이면서도 조금도 속물스러운 데가 엿보이지 않는 것은 무늬의 구상이나 솜씨에 허욕과 아첨이 없는 까닭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민속공예가 항상 범하기 쉬운 객기를 늘 아슬아슬하게 딛고 넘어가는 조선시대 공예가들의 안목이 새삼스럽게 돋보인다.”라고 적었다.



 좋은 글과 좋은 그림을 접하니 흥이 난다.

겸재 정선의 한국 풍경화 중 <금강산 만폭동도>라는 그림이 있다. 이 화폭의 중앙 너럭바위 위에 동자를 거느리고 서있는 두 명의 선비가 있다. 한 선비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의 청송靑松 뒤편으로 신선이 보인다. 신선 하나가 편히 앉아 시름없이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자세히 보면 바위 두 개를 겹쳐 그린 듯하나 나는 자꾸 앉아있는 신선이 보인다.


 한국에 살다 보면 때론 우연이 가져다준 좋은 기회로 한국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있겠으나 나 홀로 어찌 경회루의 돌기둥에 대해 혹은 경복궁의 옛 담장에 대해 그리고 불상과 탑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 마음속으로 되 집어볼 수 있을까? 글 덕분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한국미에 대한 찬양은 <삼척 비석머리>까지 연결된다.

조선시대 무명의 석공이 새겨 놓은 알 수 없는 일렁이는 파도무늬와 불규칙한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들어있는 추상의 비석머리 마저도 아름답다.




 나는 이제 고려의 아름다움을 좀 더 깊게 느낄 수 있으리라. 나는 이제 조선의 아름다움을 좀 더 넓게 느낄 수 있으리라. 한국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박물관에서건 미술관에서건 여행길에서건 나의 발걸음은 더욱더 늦어질 듯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숨 /독후감14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