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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Aug 28. 2021

아버지의 책 /독후감158

장인어른께서 암을 이겨 내셨다.

혈액 수치가 정상이라는 통보를 받으셨을 때 얼마나 기쁘셨을까? 처음 암이라는 판정을 받으셨을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모든 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하며 과정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스위스의 어느 깊은 산골 마을에 들어서면 관들이 보인다.

첫 번째 집 앞에는 사람 크기의 관 세 개가 놓여 있다. 모든 집(!) 앞에 그런 관들이 놓여 있었는데, 대부분 오래되고 비바람에 낡은 나무관들이었지만, 그중 몇 개는 밝은 나무에 새로 대패질을 한 흔적이 보였다. 다섯 개 혹은 열 개의 관이 놓여 있는 집들이 있는가 하면 겨우 두 개만 놓여 있는 집도 있었다. 마을 사람 누구나 출생과 동시에 관을 얻었다. 훗날 그의 수명이 다하고 나면 그는 그 관 속에 눕혀졌다.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관은 집 앞에서 기다렸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자신의 관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 중에 관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물론 카를도 자신의 관을 받았다.


 이 깊은 산골 마을에는 또 한 가지 특별한 전통이 있다.

아이가 열두 번째 생일을 맞으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이한 성년식을 치르고 그 아이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해 나가야 할 백서를 선사한다. 그가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책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되며, 그가 죽은 후에는 모두가 그 책을 읽고 그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 책을 백서라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이 백지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날까지 자신의 하루하루를 자신의 방식으로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 ‘카를’의 성년식으로부터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의 일생의 기록을 읽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은 카를의 아들이 아버지의 백서를 읽고 난 후 재구성해낸 것이다.


“아버지”하고 내가 불렀다.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죽었다.

나는 아버지의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그가 조금 전까지도 기록하고 있었던 그의 책 마지막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아마도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던 듯하다. 마침표가 찍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책을 뒤적여보았다. 모든 페이지마다 글씨가 가득 씌어 있어서 그곳에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10~15장 정도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그 부분은 하얀색으로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때가 오기 전에 죽은 것이다.




암을 이겨 내시기 전까지 장인어른께서는 하루하루 어떤 내용을 백서에 적으셨을까 궁금하다. 그 지난至難했던 과정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함에 죄송하고 다시 건강해지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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