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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Oct 02. 2021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독후감163

줄리언 반스

 큰 공원 트랙 길을 따라 뱅뱅뱅 도는 산책보단 멋진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와이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산책이 더욱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기분 좋은 산책 중의 경험처럼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은 몇 가지 그림들을 잊힐 수 없게 한다.

1989년부터 2013년에 걸쳐 영국의 미술 전문잡지를 비롯한 여러 유명 잡지에 실린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대부분의 미술책 혹은 미술 역사책들은 설명할 법한 혹은 이미 누군가가 설명했을 법한 작품들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는 어느 미술관인가? 내가 듣지도 가보지도 못했던 미술관에 와 있는 듯하다. 책을 읽다 보면 사적인 미술관에 와 있는 듯하다.




갤러리에 방문하면 그림 앞에서 작가 의도나 작품 제작 당시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허나, 그림을 통해서 작가의 성품까지 판단할 수 있을까? 발로통 Fellix Vallotton은 근면과 통제와 어려운 기법의 가치를 믿었다. 그러나 교묘한 솜씨나 고도의 기교, 그림의 ‘운’이라면 아주 질색했다. 그림엔 작가의 세상이 분명히 녹아 있다.

미술사는 흘러가다가 엄청난 피카소를 만나서 피카소가 활동하던 동시대의 화가들에 대한 관심을 건너뛰는 듯하여 나와 같은 일반인에게는 알려질 틈이 없었다. 큐비즘 Cubism 시대에 나비즘 Nabisme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발로통은 자신의 그림들이 잘못된 가격대로 분류되는 사실을 깨닫고 “평범한 그림은 언제나 너무 비싸고, 훌륭한 그림은 부르는 가격이 비쌀 수 있는 반면, 정말 훌륭한 그림은 절대로 지나치게 비싸지 않지요.”라고 말한다.

발로통의 그림을 10년 단위로 구분해보면 일몰을 그리지 않은 시기가 없었다. 왜 그는 그렇게 일몰을 그리면서도 일출을 그리지 않았을까?


보나르 Pierre Bonnard는 지금의 코로나 시대에 딱 맞는 ‘집콕’ 화가일 수 있겠다.

풍경화는 집이라는 안전한 곳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그리거나 높은 발코니에서 그린 것이 많다. 보나르 풍경화에는 바람은 있을까? 보나르 잎은 바람이 별로 불지 않아서 보나르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더구나 공개적이고 진보적이며 과시하기 좋아하는 피카소가 알게 모르게 견제했던 어쩌면 위협을 느꼈던 인물이라고 하니 좀 더 사적으로 관심이 간다.

 집콕 화가도 있지만, 마그리트 Rene Magritte의 <예지력>(1936)이라는 그림은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진다. 마그리트로 보이는 사람이 팔레트를 들고 이젤 앞에 앉아 있다. 그는 갈색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 위의 새알을 바라보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새 그림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새는 캔버스의 맨 바탕을 배경으로 날개를 펼친 채 의기양양하게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산뜻하고 쾌활하다.


 올든버그 Cleas Oldenburg 예술의 무엇이 좋은지 알기 위해서는 예술이 뭔지 잘 몰라도 된다. 그가 진정한 팝아트 작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팝아트의 목적은 예술의 주제를 확장하고, 그 제작에 쓸 소재를 확장하며,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작품들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거나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미소 짓고 낄낄거리고 어리둥절해졌다가는 다시 미소 지으면 그만이다. 하나하나의 팝아트는 그 각각이 주장하는 바는 자명하게 드러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지각변동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프로이트 Lucian Freud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의 손자였다. 그의 그림들은 진실을 당당히 말하듯이 여성의 외음부를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프로이트의 여성 모델들은 마치 검사를 받는 양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다. 누드화들은 차갑고 잔인해 보인다. 여자를 그렸다기보다는 살을 그린 그 그림들. 

분명 유전적으로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듯하다.




이 그림들을 다르게 그렸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화가가 평생을 들여 찾은 자아가 다르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아 아쉽다, 그림에 질감을 좀 더 표현했으면 좋았을걸, 콜라주로 했더라면, 좀 더 ‘가슴’으로 그렸더라면 정말 좋았을걸 어쩌고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결과는 오히려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뿐이다.

책에는 그림 사진이 많지 않다. ‘그래! 사진이 많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글을 읽다가 중간중간에 그림을 찾아보는 것이 번거로울 수도 있으니. 그림을 찾아본 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냥 온전히 책에 집중해 읽으며 상상하고 반스 씨와 산책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리고, 이제 알겠다.

작가는 오른쪽을 말하고 싶으면 왼쪽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다. 콕 집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반대편 무엇을 집어내어 설명하며 자신의 의도를 나타낸다. 한 방향만은 아니다. 상당히 다방면으로 범위를 넓히며 대조하고 비교한다. 현학적이라고 하면 줄리언 반스가 싫어할까? 여하튼 책 표지에 쓰여 있는 문장 하나에 진정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이런 미술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반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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