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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Oct 09. 2021

나를 보내지 마 /독후감164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은 굽이쳐 흘러가는 급류 같지 않다.

잔잔히 모든 것들을 만져보고 찬찬히 차분하게 흘러간다.

글이 밝을 때는 앙리 마르탱 Henri Martin 그림처럼 연한 잿빛 온유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글이 어두울 때는 겨우 앞을 분간할 정도의 어둠 속에서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프란츠 폰 슈투크 Franz Stuck의 <Shooting Stars> 그림이 연상된다.

아니다! 그의 글은 밝을 때도 어두울 때도 없다.

명암을 측정하기 어렵다기보다는 명암 변화가 없다. 

그만의 방식대로 속도대로 씌어 나가고 읽혀 나간다.




 문제는 그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의 주제가 너무나 독창적이며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캐시가 회상하는 평범한 영국의 기숙학교 생활로 시작하지만 그 기숙사는 장기 기증이 기약된 아이들의 기숙사이다. 그곳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인간의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복제되어 온 존재들이다.

 그의 글 자체 흐름은 잔잔할지언정 화자가 회상하는 이야기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너무나 너무나 잔잔히 흘러가는 글의 흐름이 점점 더 점점 더 잔인하게 조금씩 조금씩 느껴진다. 그리고 크나큰 사실은 이것이 다행히 픽션이지만, 작가가 내어주는 만큼 받아 읽다 보니 어느덧 기증을 위한 존재들을 당연시하게 되고 그들의 기증인과 간병인으로서의 삶을 읽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 대부분은 십 대 중반이 되어 기숙학교를 떠나고, 자신이 기증하기 전에 다른 기증자들을 돌보는 간병인의 직업을 갖는다.

 소설에선 ‘잿빛’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어쩌면 자주 볼 수 있다고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 이 소설은 아무리 밝아도 잿빛 소설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하자.’

기증을 한다는 엄청난 행동의 소설이지만 모든 것은 대화로 이어진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하자.’라는 이 말 한마디가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하며, 숨길 수 없이 털어놓으며, 이미 했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조곤조곤 모두 다 설명한다. 그래서 화자인 캐시의 속마음을 모든 독자가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작가가 원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캐시와 작가는 일심동체로써 소설에 머무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인간임에도 인간의 자잘자잘한 감정선을 막상 정확히 읽고 있으니 참으로 동감이 간다. 허허, 웃음도 나고.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들을 눈앞에 쫘~악 펼쳐 놓고 들여다보는 듯하다. 내가 느끼는 가즈오의 소설이다.


 기증자들의 크나큰 꿈은 기증의 ‘집행 연기’이다.

연기된 몇 년의 기간 동안 사랑하는 사람과 살기 위함이다. 안쓰럽고 처참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상황 자체가 무섭게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이언 매큐언 Ian McEwan의 글을 읽을 때 느껴봤다. 또한 한강의 글을 읽을 때 느꼈던 느낌이다. 무언가 음울하고 습한 느낌, 암울하고 늪과 같은 느낌이다. 

 책을 읽다가 ‘내가 맨 부커상 The Man Booker Prize을 정의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도 맨 부커상을 받았고, 이언 매큐언도 한강도 맨 부커상을 받았다. 섬뜩하고 불편한 감정을 일으켜야만 맨 부커상을 받을 만한 자격의 소설이 되는지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아마 상을 받기 위해선 일반인에게 일반적인 이상의 느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장기기증을 하고 죽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장기기증이라는 크나큰 결정을 하는 삶과 태어나기도 전에 장기기증이 결정되어 장기기증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 삶을 비교해본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바꾸어 나갈 수 있고, 희망을 갖고 산다는 자체는 크나큰 축복이다.

내 의지와 생각과 노력에 의해 내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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