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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Feb 26. 2022

주홍글씨 /독후감184

 “A”가 쓰인 주홍글씨를 말한다.

Adultery의 머리글자로 간통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글씨는 헤스터 프린의 굴할 줄 모르는 참회의 의지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저주의 A자로부터 Able(유능함)의 A자로, 심지어는 Angel(천사)의 A자로 바뀌어 간다.

 17세기 청교도주의의 본고장인 뉴잉글랜드, 지금의 보스턴에서 주홍글씨 A자를 가슴에 달고 다닌다는 것은 야밤에 힙합패션 인양 큼지막한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A자 목걸이를 걸고 다닐 만큼 눈에 띌 일이다. 하나님과 성경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주홍글씨를 달고 사는 삶은 희망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지은 죄로 말미암은 딸아이 펄과 한평생을 살아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다음 질문에 다다른다. 

헤스터의 남편은 누구일까? 

아이의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


모든 이가 같은 삶을 살지 않기에 다른 사람의 삶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피하고 싶은 삶이 있다. 주홍글씨를 달고 사는 삶!! 그런데, 요즈음도 과연 그럴까? 주홍글씨로 다른 삶들을 상상해 본다.

‘주홍글씨’가 누구에게는 알려진 얼굴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이름 석자일 수도, 누구에게는 살면서 남긴 흔적일 수도 있다. 외부로 나가면 누구나 자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사정과 심정과 상황을 모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홍글씨는 남들이 비난하는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남들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게 된다.


 여하튼 그래도 주홍글씨는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부정否定의 ‘어쩌다가 그랬을까?’ 혹은 긍정肯定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의 각기 다른 표현의 단순한 두 가지 의문에서 시작한 범인凡人들의 눈초리는 별반 차이 없지 않을까?

 죄에 대한 동정심이 생긴 것이든 성공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 것이든 진실이 드러났다면 지금 시대에 주홍글씨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붙어있을 수도 있다.

아빠를 모르는 아이가 용납되지 않은 청교도 사회에서의 주홍글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지금이지만, 주홍글씨를 가슴에 서로들 붙이려고 하는지, 붙이기를 거부하는지 모호한 지금이다.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한다면 모두 다 절망해야만 하는 것일까?

주홍글씨를 평생 가슴팍에서 떼어낼 수 없었던 헤스터 프린도 그녀를 구제해줄 그녀의 희망인 펄이 있었다. 비록 펄은 그녀의 정욕의 증거물이며, 이로 인해 주홍글씨를 달게 했던 딸아이였지만.

절망의 끝은 상승이다.

절망의 증거가 희망을 만들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영화 대본이나 소설의 줄거리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듯 우리 모두의 삶은 바닥을 치면 올라가게 되어있다. 그런 사이클을 믿는 것이 삶이다.

삶들이 각자 다른 이유는 각자의 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최저점을 쳐야만 올라가는 이가 있을 것이고, 자신이 느끼는 저점에서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이가 있을 것이다. 모두의 변곡점에서 각자 죽을 만큼 힘들 것이다.

 그래도, 어딘가 찍고 상승한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희망이며, 그런 의미에서 펄은 헤스터의 희망이 아닐까?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도 희망은 있다.




오늘날 주홍글씨로는 무엇이 있을까?

예전 형벌이었던 얼굴에 죄인의 표식을 하는 것도 지금은 타투 tatoo가 되어 더 이상 주홍글씨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전자 발찌는 찼는지 안찼는지 알 수도 없다.

물리적이든 도덕적이든 주홍글씨가 어떤 것인지 모호한 지금이다.

다행히 소설은 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헤스터 프린의 남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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