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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ul 30. 2022

이슈, 중국 현대미술(1) /독후감206

 시진핑 때문에 중국어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시진핑 덕분에 세계적인 프리즈 Frieze 아트 페어가 한국에서 개최된다.

모두 중국의 폐쇄정책 때문이다.

폐쇄정책 때문에 미술 길도 막혀 중국의 현대미술을 접할 기회가 없던 와중에 내가 딱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만났다. 와싸이!! [ wāsài ] 哇塞!!

알고 싶었던 중국 현대미술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한다.

접하고 싶었던 중국 당대 미술을 이해하는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주는 귀한 책이다.

중국 미술계에서 아직 공식 합의된 것은 아니지만, 책에서는 일반적으로 개혁 개방 이후 1989년까지를 ‘현대 미술’로 1990년대 이후 현재 까지를 ‘당대 미술’로 서술하고 있다.




문화 대혁명 시대를 포함한 마오쩌둥 시대 (1949~1976)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시대(1976~1989)를 거쳐 글로벌 시대(1989~현재)를 관통한 묵직한 중국 예술가 12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 우관중 吳冠中 Wu Guan Jhong (1919~2010)

칠흑 같은 10년 세월, 문화 대혁명의 어둠이 내리깔린 시기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그림을 가위로 자르고 태우거나 흰 물감으로 칠해버려야만 했다. 그의 인물화, 소묘, 크로키, 파리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이 이때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혁명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회화 창작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그러나 병세는 여전했고, 우관중은 차라리 그림을 그리다 죽으리라 결심했다. 그는 시골에서 쓰는 분뇨 지게를 이젤로 삼아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두 사람 씩 그의 곁에 모여들더니 ‘분뇨 지게 화파’가 형성되었다.

 홍콩 예술관 소장인 [제비 한 쌍] (1981, 화선지에 수묵채색, 70X140cm)을 우연이라도 마주쳤다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 것이다.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눈길을 잡아 이끌어 그림 앞에 묶어 두는 힘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2. 황루이 黃銳 Huang Rui (1952~)

“베이징의 아마추어 청년 작가 작품, 주제와 형식은 상관없음. 장르와 재료도 상관없음. 모든 조건을 개방함. 단 미술관에서 원하지 않는 것, 미술관에서 전시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함.”

 제1회 싱싱(星星) 미전을 열기 위해 황루이가 정한 새로운 멤버들의 조건이었다.

1979년과 80년 두 차례의 ‘싱싱 미전’은 중국에 ‘동시대’ 미술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미술 전시회이다. 

‘별들(星星)’이라는 명칭은 사회주의 시기에 유일하게 빛났던 마오쩌둥이라는 태양의 반대 지점인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들, 즉 이름 없는 인민들을 상징한다.

798 예술구의 국제 따산즈 예술제 DIAF도 어떻게든 798 예술구를 보존하고 싶었던 황루이를 주축으로 ‘우리는 예술가이니 예술이라는 방법을 통해 투쟁해보자!’라는 결론 아래 시작되었던 예술제이다.

1984년에 그린 [팔괘] (캔버스에 유화, 각각 11X11cmX4점)는 거의 40년 전 그림이지만 중국 전통사상과 미니멀리즘이 결합된 작품이다. 중국과 일본이 미묘하게 섞여 있는 흔치 않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3. 저우춘야 周春芽 Zhou Chunya (1955~)

 서구 현대 회화의 자유분방함과 강한 힘을 좋아했지만, 중국 전통 회화와 신유가 사상, 고대 원림의 독특한 매력에도 깊이 이끌렸다. 이런 이유로 외향적이고 격정적인 표현주의와 오랜 시간 음미할 수 있고, 섬세하고 민감하면서도 신비로움이 충만한 전통화를 모두 표현하고 싶었다. 표현주의와 중국화 사이에 세워진 인위적인 장벽을 해체하는 시도가 그의 작품이다.

 도화桃花는 중국 전통 문학이나 회화에서 색정을 상징해왔다.

붉은 색인 모란이나 장미를 택하지 않고 도화를 선택한 것은 도화가 지닌 특별한 매력 때문이다. 도화의 꽃잎은 바깥은 희고 속살은 붉은색을 띤다. 수줍은 소녀처럼 외향적이지 않으면서 살며시 숨겨진 매력은 사람을 더욱 아찔하게 유혹한다. 이러한 매력은 저우춘야가 추구하는 성격과 기질에 더없이 부합하는 것이다.

 그의 [도화] 시리즈가 지향하는 것은 모든 존재가 가장 부드럽고 열정적인 방식으로 폭발적인 융합을 일으키는 카오스의 상태다. 직접 가로세로 200cm가 넘는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아찔함을 감출 수 없다.


4. 마오쉬휘 毛旭 Mao Xuhui (1956~)

마오쉬휘는 윈난 사범대학 미술학과로, 장샤오깡은 충칭의 쓰촨 미술학원으로 헤어졌다. 두 사람 간에 장기간 이어진 통신 교류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그들의 고향인) 쿤밍과 (장샤오깡이 다니는 학교가 있는) 총칭 두 지역의 회화에 대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었다.

쿤밍의 회화는 맑고 쾌청한 기후 덕에 색채가 강렬하고 시적이지만 원근법 구사에서는 공간감 표현이 부족했고, 반면 항상 구름이 끼는 총칭의 회화는 공간감은 잘 표현했지만 소련 사실주의 회화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1989년 6월 텐안먼 사건으로 다시 찾아온 암흑은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권력에 대한 사고를 더 큰 맥락으로 확대시켰다. 이제 그의 그림에서 권력의 문제는 사람들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일상적 문제로 확장되었다.

많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뒤로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상업화로만 치닫는 중국 정부의 변화에 대해 아직도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마오쉬휘에게는 이전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현실이 계속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굳은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두고 대신 엄청난 양의 글 속에 사회와 자신을 향한 격렬한 비판, 반성, 분노를 쏟아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위는 그 다양한 일상물 가운데 다른 것들을 누르고 대표적인 권력의 화신이 되어 그의 화면을 지배해 나가기 시작했다. [거꾸로 선 반쪽 붉은 가위]나 [붉은 가위] (2001, 캔버스에 유화, 180X130cm) 등의 [가위] 시리즈를 보면 마오쉬휘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5. 예용칭 叶永 Ye Yongqing (1958~)

 쓰촨 미술학원 대학시절 예용칭과 장샤오깡, 저우춘야는 다른 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인상파 화집 앞에 나란히 앉아 화집 안의 작품들을 정성껏 모사했다. 학교에서 주류를 이루던 비판적 사실주의 그림에 비해 이들이 추구한 그림은 평면적이고 시적이며 때로 현실도피적인 성향마저 보였다. 결국 예용칭과 장샤오깡은 쿤밍에서 온 두 기괴한 화가라는 뜻으로 ‘쿤밍 양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5년 쿤밍에 있는 마오쉬휘, 장샤오깡이 <<신구상>>전을 개최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전국적으로 ‘85 미술 붐이 일고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중국미술관에서 열린 라우션버그 Robert Rauschenberg의 전시를 보고 순간 당대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총칭에 돌아와서 자신이 사는 총칭의 공장, 굴뚝 연기, 괴상한 짐승, 검은 비행기 등 공업 문명의 이미지를 삽입하기 시작했다.

 해외 출입을 시작한 이후로 예용칭은 무거운 관념에서 벗어나 가볍고 일상적인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양도 서양도 아니고, 옛 것도 현재도 아닌’ 자신의 작업을 반성하고, 자신의 기질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을 찾기로 했다. 사이사이 1998년에는 쿤밍에 예술가의 자영 공간인 ‘쿤밍 상허회관’을 설립했으며, 중국 내 열악한 당대 예술 환경 개선을 위한 2000년 쿤밍 추앙쿠의 설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친밀감과 만족감을 주는 수묵으로 환원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해온 새를 그리기 시작한다. 본인의 생활 자체가 철새처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것이기도 하고, 그 고졸古拙한 낙서 같은 새는 그에게 무엇보다 해방감이다. 크레용으로 어설프게 낙서한 듯한 수묵의 거대한 스케치를 보면 잡념을 가라앉히며 그림에 집중하는 예용칭이 보인다.


 6. 왕광이 王广, Wang Guangyi (1957~)

 하얼빈 출생의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팝아트를 시도한 예술가이다. 

1985년 ‘북방청년예술단체’를 조직하고, 북방 문화의 정신이 부패한 세상의 문명, 말하자면 퇴폐한 자본주의 문명과 이성 정신을 결핍한 중국 전통 문명이라는 절망적 상황에서 인류를 구원하여 건강하고 완벽한 정신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86년 왕광이는 광동성의 주하이화원으로 직장을 재배치 받아 다시 남방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확실히 ‘진지한’ 북방 문화와는 전혀 다른 ‘불손한’ 남쪽 상업 도시 주하이로 옮겨온 것이 분명했다. 북방 문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중세식 <후고전> 시리즈는 점차 다다이즘식 <후고전> 으로 선회했다.

 1989년 <<중국 현대 예술전>> 전시장 1층 정중앙에는 왕광이의 [마오쩌둥-AO] (1988, 캔버스에 유화, 120X150cmX3장)가 버젓이 걸려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초상화에 과감히 격자무늬를 그려 넣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알파벳 A, O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대비판] 시리즈!!

강렬한 시각 효과를 지닌 문화 대혁명 시대의 포스터와 중국에까지 쳐들어와 위세를 떨치는 서구 자본주의 유명 상표의 결합. 너무나도 엉뚱한 조화지만 어딘가 모르게 유사한 속성이 느껴지기도 하는 두 문화의 절묘한 공존. 그리고 둘 중 누구를 겨냥하는지, 혹은 모두를 겨냥하는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제목 ‘대비판’

 서방 세계에서 세심한 주의 없이 ‘중국 주류 정치 이념을 재치 있게 풍자한’ 그림으로 이해한 [대비판]은 인기리에 미술 시장과 전시장을 점령해 나갔다. 왕광이는 역시 ‘선악과를 따먹은 예술가’라고 불릴 만하다.


(나머지 6인은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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