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우연을 바라며 소설을 펼쳤다.
작가 연보를 보니 1997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암종증 진단을 받고 돌아가셨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절실하게 그려낸 소설 배경은 나의 중고등학교 주변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나에겐 향수마저 자아낸다.
소설을 읽는 내내 조급함이 느껴졌다.
단명短命에 대한 조급함이었을까? 가난에 대한 조급함이었을까?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기도 하고 이번 주 펼친 책의 마지막 소설이기도 한 [동물원]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다가 미완성으로 끝나버렸을 때는 나 혼자 먹먹해졌다.
한 편의 소설 안에 열 편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들어앉아 있었다. 서서히 하나하나 풀었더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흘러가는 이야기는 끝까지 길을 잃지 않고 마무리되지만 그 길을 찾아 읽는 나는 가끔 길을 잃으면서 조급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먹먹해진다.
차례에 적힌 제목들조차도 무언가 함축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10년 남짓 차이나는 나이에 비해 내가 쓰는 단어들과 참으로 달랐다. 나보다 열 살 형이었을 사람이 이제는 돌아가신 회기동 우리 외할머니 생각을 저절로 나게 한다. 청량 국민학교 앞 시장에 가면 깨를 볶아 참기름을 팔던 옆집에 뜨듯하고 기름진 뎀뿌라도 생각나고 그 집에서 앉았던 긴 의자 위의 노란 모노륨 장판 무늬도 생각나게 한다.
소주가 아닌 ‘쐬주’, 갈매나무, 베이커리가 아닌 ‘배커리’ 그리고 부엌, 건널목, 항아리, 동물원 등등. 그냥 그가 이야기하면 그냥 나를 먹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신풍근씨는 현경과 재덕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서로에게 지청구를 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물부리를 깊숙이 빨았다. 그의 양 볼이 또다시 움푹 꺼져 들었다.’
지난달에 펼쳤던 이광수의 [무정]보다 단어들이 녹록지 않다.
1910년 보다 1990년대에 쓰인 단어가 어렵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그만큼 작가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잊지 않고 꾹꾹 눌러가며 글을 쓴다.
소설 한 편 안에 들어앉은 여러 개의 이야기들이 기름과 물 마냥 둥둥 떠다닌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개의 이야기를 읽다가 갑자기 눈깜작이면 공간 이동하듯 바로 다음 줄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의 훌륭한 소설이 될 만큼 딴딴하고 재미있다.
물론 앞의 이야기와 다음 줄의 이야기가 결국엔 작가가 잘~~ 닦아 놓은 마지막 종착점에서 만난다.
그래도 그래도 김소진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너무나 가난하다.
그의 소설 속 잘 사는 사람들 마저도 다른 소설들과 비교하면 가난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소설 배경이 되는 장소가 가난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을 모두 통틀어서 제일 가난하다. 그래서 또 한 번 더 먹먹해진다.
그래서 언젠가 멜랑콜리한 생각이 문득 날 때면 다시 한번 김소진을 기억하며 책을 펼칠 듯싶다. 나를 기억하기 위해. 나를 위로하기 위해. 살면서 분명히 이 시절을 소환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외할머니 산소를 근간에 찾아뵈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