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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ul 13. 2019

그리스인 조르바/ 독후감45

 문득 그리스인 조르바 할아버지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이 오버랩된다.

두 분은 완전히 생물학적으로는 극과 극이지만 자유와 모험을 뼈 속까지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소설 속 허구적인 인물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끊겨 자주 볼 순 없더라도 친근감을 갖고 있는 나의 지인들과도 같이 느껴진다.

소설로써 최고의 영예를 꼽는다면 읽는 독자가 소설을 현실처럼 느끼는 것이 아닐까? 

조르바는 배우 앤서니 퀸의 외모로 빙의되어 독자인 나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조르바는 나에게 살아있다.




 조르바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우리와 반대이다.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근심 걱정을 잊기 위해 산투리(악기)를 켜는 것이 아니고, 산투리를 켜기 위해 좋은 환경을 찾아 나선다. 

조르바의 건너편에는 조르바가 ‘두목’이라 부르는 젊은 지식인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소설 전체의 구도가 그려진다. 조르바와 두목 사이에 여자가 존재하고 이들의 위에는 신이 있다. 중간의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스토리는 아니다. 여자는 하나의 존재이자 그 둘이 인생을 푸는 화두이다.

조르바와 두목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면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와 행동에 대해 하느님을 믿건 믿지 않든 간에 동의와 자비를 구하기도 한다. 서로의 대화가 기쁨이 되고, 서로의 생각에 다름이 있고 때론 배움도 되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탄생한다.


 글을 통해 두 사람은 참으로 다르다고 느낀다. 두목은 말한다. 생각이 많다.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구입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 –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을 빨아올리는 걸 감지합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조르바도 두목에게 이야기한다. 둘은 참으로 다르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사람은 영향을 받는다. 어느 순간 ‘띵’하고 받을 수도 있지만 보이지도 않는 작은 틈으로 들어와 조금씩 삼투압 빨려 들어가듯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처음에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 치다 어느 순간인지도 모르게 영향은 가지를 뻗어 나의 중심이 된다. 조르바는 두목에게 영향을 미친다. 논리와 도덕과 정직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두목은 조르바라는 원시적인 인간에게 영향을 받는다.

글을 읽는 내내 조르바와 두목의 비교표를 만들고 싶을 지경이었으나 둘은 다르지 않다.

아니 둘은 어쩌면 한 사람 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외면과 내면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내면은 추악하고 음탕하고 더럽지만, 외면은 이를 감춰 점잖으며 고뇌하며 신사적이다.


 두목이 무의식적으로 과부의 정원 앞에 이르러 있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결국 두목이 조르바에게 동화되어가는 과정의 글인가?’라고 생각했다. 둘 중에 누가 이긴 것인가? 누가 이긴 것이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고뇌 중에도 인간 본성을 무시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계속 중요시하고 갈구하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에 동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그들의 사업은 실패했다. 세워놓은 철탑은 기울어지고 결국은 차례차례 쓰러졌다.

두목의 고뇌와 조르바의 자유는 결국 인간들만의 자유였고, 신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 듯했다.

하느님이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조르바의 춤사위만이 아닐까?

조르바와 두목이 해변에서 양팔 벌려 춤추는 장면이 계속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래서 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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