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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Aug 17. 2019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 독후감50

오늘의 불안을 이기는 내일의 경제학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아들과 질풍노도의 시기가 기억나지도 않은 나.

30년 차이가 나는 우리 둘 상간(相間)의 마음속 이야기일 줄 알았다.

우리 부자지간은 사회적으로도 많이 다른 삶을 살겠지만 경제적으로도 많은 다른 삶을 살겠구나!

지금 나는 내 아버지가 선택한 결과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마찬가지로 내 아들은 오늘 내가 선택하는 결과의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오늘 나의 생각과 선택이 중요한 이유이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세대는 고성장 시대를 겪은 50세 이상의 아버지 세대이고, 아들의 세대는 지금 저성장을 겪고 있는 1990년대나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에 사이에 낀 중간 세대이다.

지금의 나는 반은 아버지 세대이면서 반은 아들의 세대이다.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는 반은 살았던 삶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반은 살아보지 못했던 아버지 세대의 삶과 앞으로 아들과 같이 살아가야 할 삶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代)가 같은 삶을 살면 좋겠지만 현실상 어렵다. 절망보다 희망을 갖고 시작할 수 있는 아들의 세대를 위해 지금을 고민해본다.



 나와 내 아들이 살고 있는 지금은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

한국의 국민소득은 늘어났다. 국민소득은 가계소득, 기업소득, 정부 소득으로 나뉘는데 90년대 초반에는 기업소득이 늘어나면 가계소득도 비슷한 정도로 늘어났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기업이 돈을 벌어도 가계로 흘러가지 않는 현상이 심해졌다. 기업과 개인의 격차가 심해졌다.

가계와 가계와의 격차인 개인소득의 불평등도 심해졌다.

맨손으로 시작해 스스로 자산을 축적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한국 경제는 자산 소득자가 이끌고, 상위 10%의 임금소득자가 뒤따르는 가운데 나머지는 모두 가라앉는 모습으로 바뀌었고, 땀 흘려 일하는 대다수의 몫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역전은 어려워졌다.

아들의 세대는 대부분이 비슷한 문화적 경험을 했다. 역설적이게도 격차가 커지고 계층 상승의 기회는 줄고 있는 가운데 유사성은 높아졌다. 아버지 세대의 대학 진학률은 20%대인 반면에 지금은 70%대이다. 예전에 대학생은 선택받은 소수였지만 지금은 모두가 대학생이다.

같은 능력, 같은 자격, 같은 경험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사회문화는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기보다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사회문제나 사회범죄가 만연해진다.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느끼게 되고 인정을 서로 베풀지 않는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진다.



 땅과 건물이 아닌 아이디어와 땀을 보상해주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몇 가지 해결책이 있다.

제론토크라시 gerontocracy란 외부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제적인 고령자 지배체제를 일컫는 말이지만 50세 안팎에 회사에서 쫓겨난 뒤 식당을 열었다가 실패하고 청소나 경비 같은 막다른 일자리에 종사하며 노후를 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한 2019년의 한국에서는 나이와 관련된 문제도 아니다. 일종의 '막차 문 닫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버스에 올라타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이 새로 버스에 올라탈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서 있게 하거나 아예 버스 문을 닫고 타지 못하게 하는 문제에 가깝다. 차 안만 따뜻하고 차 밖은 각자도생의 '헬조선'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 다른 계층이 리더십을 가질 수 있도록 균형 잡힌 거버넌스 governance를 도입하는 것이다.

정치의 경우 공직에 20~30대를 대거 등용해 균형을 잡고, 경제의 경우 30~40대가 주요 기업의 CEO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든 이전 세대의 성공 요인이 다음 세대의 성공 요인으로 이어지는 일이 드문 이유로 새로운 사회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들어서야 그 사회는 새로운 잠재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세대의 고성장은 양적 성장을 중요시했으나, 저성장 시대 한국 사회의 성장은 질적 성장을 고려해야 한다. 분배가 얼마나 되어 있는지, 특히 하위층 삶의 질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즉 어느 정도의 소득 수준, 인간관계, 사회 참여가 있어야 만족스러운 삶인지 우리가 직접 정의해야 한다.

예전에 일자리는 성장의 통로였지만, 이제 일자리는 성장의 기회가 아니라 경제적 안전의 기회이다.

소득 수준으로 따지면 급여가 아주 많지도 아주 적지도 않은 일자리를 '중간 일자리'라 하는데 이런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전체 일자리 규모가 커져야 다음 세대의 일자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대졸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세대가 오면 많은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중산층이 두터워져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중간 일자리이다. 이를 위해선 개인의 노력보다는 적절한 사회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정하기 어렵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아무 문제없으니 나보다 훨씬 강한 이들만 변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은 세상을 영영 제자리에 붙들어둔다. 상위 1%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99%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결국 내가 바뀌지 않으면 사회에서 느끼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느끼는 공포를 없앨 수 없다. 오늘 나의 생각과 선택이 미래에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서 절망보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와 아들의 나라는 명확히 다르지만 아버지는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책임이 있고,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책임이 있다.

99%인 우리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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