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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Aug 24. 2019

두 도시 이야기 / 독후감51

London and Paris

 두 도시는 런던과 파리이다. 

찰스 디킨스의 런던과 알렉상드르 뒤마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의 저자)의 파리 중 좋아하는 도시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소설이 시작되는 1775년부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는 즈음의 런던과 파리는 모두 다 흉흉했다.

 한 여인의 후작(侯爵, marquis)을 향한 간청은 가난 때문에 죽은 남편이 묻혀 있는 곳을 표시하여 꽂아둘 남편의 이름을 새길 작은 돌이나 나무토막을 베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도시의 후작 각하나 시골의 후작 나리의 횡포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도시와 농촌에 사는 민중 모두의 경제적 빈곤을 읽다 보면 프랑스 대혁명은 예견된 하나의 수순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와중에 디킨스는 런던의 손을 들어준 듯하다. 자신이 런던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런던은 안정된 공간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미는 새 삶의 공간으로 묘사되지만, 파리는 혁명의 광기가 몰아친 기요틴 guillotine이 춤추는 공간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폭동의 발생 지역인 생앙투안에서 빈곤의 묘사는 처절하다.

‘쥐똥만큼 적은 양의 장작을 톱으로 자르느라 쌓인 톱밥 속에도 굶주림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중략) 굶주림은 소시지 가게에서 팔려고 내놓은 죽은 개로 만든 핫도그 위에도 모두 새겨져 있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욕구가 억압되고 무시되는 기간들이 끝도 없이 길어지게 되면 갇혀진 감정과 슬픔들은 어디로든 분출되어 폭발하게 된다. 이성의 문제가 감정의 문제로 전도되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어제 나는 가해자의 주어 subject였지만 오늘 나는 목적어 object가 될 수 있다. 혼란 그 자체인 것이다. 

역사로 보아 이와 같은 원인과 결과는 진리인 듯하다.

 디킨스가 소재로 사용한 [프랑스 대혁명]의 상황과 전개는 흡사 중국 소설가 위화의 단골 소재인 [문화 대혁명]과 비슷하다. 폭동을 일으키고 폭동에 휩싸이면서 혁명의 본질은 찾기 힘들고 오직 복수심과 광기만 남는다.



찰스 다네이는 파리에서의 귀족 지위를 버리고 런던에 와서 자신의 노동과 노력을 가치로 여기는 삶을 살면서 루시 마네뜨와 화목한 가정을 이루지만............

18세기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들보다 훨씬 더 순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지금으로서는 약간 의아하기도 하고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작은 감정에 충실하고 상대방에게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을 읽을 수 있다.

 루시 마네뜨가 시드니 칼튼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워낙 절망감에 젖어있는 상황에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랑이 아니면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없는 건가요? 칼튼 씨? 그럴 수 없는 절 용서하세요! 그럼 제가 당신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 수는 없는 건가요? 절 믿어 주신 당신에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건가요? 이것이 저에 대한 믿음이란 걸 전 알아요.”


 런던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다네이는 자신이 버리고 온 파리의 가문에 충직했던 늙고 선량한 하인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편지를 받고 그를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와이프 루시와 딸 그리고, 장인어른인 마네뜨 박사를 뒤로하고 파리로 떠났다.

[두 도시 이야기]가 나에게 묻는 듯하다. 

가문의 명예와 정의를 위해 너는 강한 의무감만으로 그럴 수 있냐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ㅠ.ㅠ



 찰스 디킨스가 누구인가? 작가 연보를 살펴보면 그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는 물론이고 영미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임을 알 수 있다. 탄탄한 이야기 구성, 사람의 감정을 귀히 여기는 작가의 기질 그리고, 특유의 반어법 표현들을 통해 침울하고 혼란했던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하고도 재미와 감동의 클라쓰가 다르다.

이와 같은 작가의 글을 가지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진부하다.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어 분리하여 남긴다..

‘의견’이라는 제목의 2부 19장은 소설을 읽는 와중에 많은 깨달음을 준다.

마네뜨 박사는 프랑스 바스티유의 독방에서 18년을 갇혀 지내면서 정신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구두를 짓는다. 런던에 정착한 마네뜨 박사는 자신을 굳건히 지키지만, 딸 루시가 사위 다네이와 신혼여행을 갔던 아흐레 동안 구두를 지었다.

 해당 챕터는 아흐레 동안 구두를 짓고 열흘째 되던 날 아침에 자비스 로리 씨와 하던 대화이다. 자비스 로리 씨는 런던 텔슨 은행에서 한 평생 몸담은 성실한 은행원이자 마네뜨 집안의 진정한 조력자이다.


 “마네뜨 박사님, 은밀히 여쭈어 볼 것이 있는데요, 제가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어떤 분의 특이한 증상에 대한 박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많이 이상한 증상이지만 박사님은 저보다 아는 것이 많으시니 별로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중략)

“재발 증상이 로리 씨가 설명한 대로라면, 아마도 그 친구도 재발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거요.”


 문제가 있을 때 의견을 구하는 법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한 해결책이지 않을까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문제 안에 혹은 문제와 함께 있다는 깨달음을 남긴다.



 

 찰스 디킨스 (1812~1870, 영국)와 알렉상드르 뒤마 (1802~1870, 프랑스)는 동시대 사람이다.

‘두 분은 동일하게 1870년에 돌아가셨구나!’

동시대인만큼 감옥살이 이야기가 겹쳐져 [두 도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에드몽 단테스가 계속 생각났다.

런던과 파리 중 좋아하는 도시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괜스레 자꾸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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