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삶의 터전에서 떠난다는 말은 참으로 허전하고 우울한 일이다.
회사에서 자신의 방이 있던 임원도, 6개월 계약기간의 인턴사원도 어떤 계기로든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쓸쓸하고 고독한 일이다.
대리운전기사는 삶의 터전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적으로 변하는 직업이다.
대리기사만이 손님의 차를 대신 운전하고 대리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면 대리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대리운전을 하면서도 주체가 나인 삶을 살면 대리인간이 아닌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의 대리인간이 아닐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대리인간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희한하게도 작가는 대리운전기사를 하면서 삶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지방대학 시간강사 시절 10년 가까이 인문학을 공부하고 강의하는 기간 동안 자신의 삶에 대해 판단하고, 질문하고 사유했을 법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든 삶의 터전에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설 수 있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한다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희한하게도 사람은 조금 더 힘든 시절에 조금 더 실천하고 조금 더 부지런해진다.
편안해지기 시작하면 자신이 허락되는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며 자꾸만 편안함을 찾게 된다.
작가에게는 ‘조금 더 힘든 시절’이 대리운전기사 시절이었던 듯하다. 사실상 시간강사 자리야 대학의 처우가 어떻든 간에 학생들의 학점을 책임지고 지식을 전파하는 자리이니 대학 내의 생태계를 따라서 적당한 위치에 포지셔닝하고 자신이 허락되는 범위에서 젠체할 수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어떤 보호막도 없다고 느껴지는 대리운전기사의 자리에서는 좀 더 솔직 담백하게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고 의심하고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순간에 따뜻한 손님을 만나 위로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나의 추측이야 어떻든 대단한 결심이었고, 대단한 용기였다.
책에는 3가지 직업이 나온다. 지방대 시간강사, 맥도널드 물류 하차 알바. 그리고, 대리운전기사.
지방대 시간강사는 월 80만 원의 생활비와 직장 건강보험과 퇴직금을 제공하지 않으며, 호칭은 “교수”로 통용된다. 학기 중에만 고용되는 4개월짜리 계약직으로 방학 중에는 아무런 수입이 없다.
맥도널드 물류 하차 알바는 주 3회의 월 60시간 노동 시간을 준수하며, 4대 보험 보장과 함께 자녀가 돌이라면 돌잔치 축하금이나 명절에는 선물을 제공한다. 퇴직금도 지급한다.
대리운전기사는 별도의 호칭이 없으며, 대리운전 다음 날 20% 수수료를 제외한 금액이 본인의 통장에 입금된다.
3가지 직업을 하나의 잣대로 비교하기는 어려우나 무언가 착잡한 마음이 생긴다.
택시운전기사 vs 대리운전기사
택시를 타게 되면 택시의 공간은 손님이 초대된 공간이 된다. 택시운전기사에게 운전석이란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손님인 우리는 좋아하는 방송을 틀어달라거나 에어컨 온도를 낮추어 달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대리운전기사에게 운전석이란 온전한 타인의 공간이다.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운전대, 엑셀 그리고, 브레이크 밖에 없을 것이다. 택시운전기사들을 비하하자는 의도가 아닌 대리운전기사들도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감각을 설명하고 싶었다.
대리운전기사의 직업을 들여다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 일수 있다.
머릿속으로 운전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콜이 핸드폰 화면에 뜨는 것에 반응하는 정신적 피로와 밤부터 새벽녘까지 대략 8시간의 업무시간 중 3시간은 걷거나 뛰어야 하는 육체적 피로를 감수해야 한다. 운전하는 시간보다 더 길다. 운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운동이라는 것은 자신이 너무나 힘들면 그만둘 수 있어야 하지만, 콜을 받고 손님에게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하는 대리운전기사에게는 운동이 아닌 노동일 수밖에 없다.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은 대리운전기사 직업은 누구나 하기를 꺼려하는 일이지만, 자의든 타의든 누구나 닥칠 수 있는 상황이다. 요즈음과 같이 불투명한 미래와 노후를 걱정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요원한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대리운전기사 직업은 노동의 순수함을 담고 있어 정직하다.
자신이 일한 만큼 수입을 얻는다. 콜을 많이 받지 못해 밤사이 몇만 원을 벌 수도 있지만, 7~8 콜을 받으면 15만 원도 벌 수 있다.
기다린다고 무조건 콜을 받는 것도 아니다. 콜이 핸드폰에 들어오는 순간 거기가 어디인지, 거기서는 어떻게 나와서 어디로 이어질 수 있는지, 막차는 몇 시까지 있는지 모두 판단해서 수락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민하는 사이 알람은 사라져 버린다. 마음만 먹는다고 대리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막차시간에 따라 내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을 공부하여 습득해야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정직한 노동은 우리를 대리인간이 아닌 주체로서 사고하게 한다.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책임과 해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부탁을 하게 된다. 나를 대신할 ‘대리인간’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대리인간’의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주체적인 삶을 지켜가지만, 어떤 이는 원하지 않음에도 타인을 위한 ‘대리인간’이 되기를 요청받을 수 있다. 이때 갈등이 빚어진다.
모두가 주체적인 삶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원래 주체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누군가 항상 자신의 ‘대리인간’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돈이나 권력으로 가능하게 했을 때 범죄가 된다. 우리 모두가 주체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누구에게 자신을 대신할 ‘대리인간’이기를 부탁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