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de and Prejudice
200년 전 영국 런던 근교에 딸만 다섯을 둔 23년 지기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집 주변에 갑부 총각이 이사를 오면서 딸 부잣집의 엄마는 딸을 시집보낼 수 있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습니다. 그녀 평생의 사업은 딸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모두입니다.
갑부 총각의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므로 첫째 딸 이외의 다른 딸들도 좋은 혼처 자리가 생기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딸 부잣집처럼 다섯 딸 모두 각자의 캐릭터를 발산합니다.
미모가 제일 출중하고, 마음씨가 착한 첫째 딸 제인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갑부 총각 빙리 씨와 헤어질 뻔 하지만 인지상정이라고 결국 둘은 약혼을 하게 됩니다.
1800년 초반에는 쉬이 접하기 힘든 캐릭터인 똑 부러지고, 하고 싶은 말 다하는 이성적인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빙리 씨의 친구인 다아시 씨와 소설 내내 썸을 타며 마지막 부분이 되어서야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16살 막내인 리디아는 이성보다 본능적 충동에 충실한 아가씨로 마을 주변에 주둔한 군대 장교와 도피 행각을 벌임으로써 제일 먼저 결혼에 골인을 합니다.
‘다섯 명 딸을 가진 엄마의 열렬한 소망은 그렇게 이루어지며 그녀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라는 드라마 대본과 같은 느낌으로 이 소설을 요약할 수 있을까?
독서의 묘미 중 하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계속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고전이나 명작을 읽고서 (막상 나 자신은 쓸 수도 없으면서) 내 맘대로 비평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읽는 내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너무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 만큼 이미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많이 쓰이기도 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어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적합하다.
비슷한 시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한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에서 주인공 ’핍’의 삶은 궁핍하기만 하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소설들이 보통 가난에 찌들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걱정하는 주인공을 묘사하지만, [오만과 편견]은 중상류층의 삶과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매일 산책과 만찬 스케줄이 끊이지 않아 화면으로 담아도 아름답게 나올 것이다.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글의 전개가 빠르게 진행되어 지루하지 않다.
흔히 보는 드라마와 같이 남녀관계를 풀기 위해 여유 있게 전개된다는 느낌보다 감정 교차 후 바로바로 새로운 인물을 등장 (위컴 씨나 가드너 씨의 등장) 시키거나 새로운 장소로 (주변인들의 추천이나 제안으로 런던으로의 여행) 이동함으로써 박진감까진 아니더라도 이야기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드라마와 영화 대본은 탄탄한 스토리가 기본이듯이 소설 스토리 또한 탄탄하다.
내가 읽은 이 시대의 소설 작가는 대부분 남성이었다. 여류 작가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이성 작가라는 점 자체가 나에겐 참으로 신선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오스틴이었으나, [오만과 편견]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결혼 압박에 대한 굴레는 계속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요즘에는 많은 여성 드라마 작가들의 활동으로 섬세하고 결혼을 주제로 한 드라마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지만, 제인 오스틴이 현재 드라마 작가로 활동한다면 참으로 매력적인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베넷 부인이 맏딸 제인의 결혼에 대한 좋은 점을 나열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남자들은 도저히 쓰기 어려운 묘사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 혹은 BBC 선정 꼭 읽어야 할 책 등으로 권장되고 있는 이 훌륭한 소설을 자꾸만 드라마나 영화 대본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도드라지는 글의 매력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무엇보다 제인 오스틴의 최강 능력은 사람의 마음속과 사람의 생각을 서술하는 능력이다.
나는 ‘어떻게’라고 생각해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지만, ‘어떻게’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어떻게’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반자동적으로 말도 나오면서 행동에 옮기게 되는 것인데, 제인 오스틴은 생각하는 ‘어떻게’를 글로써 표현한다. ‘어떻게’라는 생각은 때론 명확하지 않아 이쪽으로 하고 싶은 마음 조금, 저쪽으로 하고 싶은 마음 약간, 하지 않고 싶은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모호한 ‘어떻게’라는 마음과 생각을 글로써 표현한다. 그녀는 그걸 해낸다.
우리들은 삶에서 관계를 맺고 유지하며 살아가지만 서로 오만하다고 편견을 갖기 마련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소설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똑똑한 엘리자베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본인 자신도 편견으로 차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만과 편견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단어들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분리시키기 어려운 단어들이다.
그런 이유로 소설 [오만과 편견]이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