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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Mar 21. 2020

보바리 부인 / 독후감82

Madame Bovary

 제목과는 달리 부인의 하얀 살결, 풀어지는 코르셋과 같은 표현은 없다.

작품 해설을 보니 작가 플로베르가 30세에서 35세까지 5년 동안 완성시킨 고심의 역작으로 빈틈없는 조사와 치밀하고 정확한 연구, 다듬고 다듬은 아름다운 문체가 돋보이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읽으면서도 상황의 전개나 배경이 눈으로 보는 것 같이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특히나 공진회에서 참사관의 연설 중 엠마와 루돌프가 대화하는 부분은 연설과 대화가 적절히 조화되면서 이야기 전개에 세련미가 느껴진다.

 이 시대 프랑스 소설은 대개 찢어지는 가난을 묘사한다.

쾌락을 위해 무분별한 어음 발행으로 결국에는 파산을 당하며 가난해지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의식주의 가난이 아니다. 이처럼 소설 [보바리 부인]은 동시대의 다른 소설들과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대에 풍부한 감정만으로 사랑에 목메어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에도 온갖 종류의 가치관을 가진,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는 것처럼.




 보바리 부인이라는 사람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평범한 일상으로 사는 본인을 너무나 불행하게 여기며 살다가 로돌프란 남자를 만났다.

‘"애인이 있다!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되풀이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또 한 번 청춘이 되살아난 것처럼 즐거웠다.

(중략) 평범한 일상은 벌써 멀어지고 까마득한 저 아래쪽 그림자 속의 산 사이로 멍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동시대 소설과 조금 다른 시각인 이 소설처럼 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보바리 부인보다는 남편 샤를에 대한 답답함과 측은지심에 관심이 갔다.


 준의사시험에 합격한 샤를은 나이 많은 미망인과 결혼했지만 사별하고, 왕진을 간 집의 딸 엠마와 재혼한다. 반면, 엠마(보바리 부인)는 단조로운 결혼 생활과 지극히 평범한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이사 간 용빌이란 마을에서 공증인의 서기로 일하는 레옹과 호감을 주고받지만 레옹은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다. 이후에 호색한 로돌프와 사랑에 빠지고 버림받은 엠마는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루앙의 극장에 갔다가 파리에서 돌아온 레옹과 우연히 다시 만나 쾌락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된다.

 레옹과의 사랑을 유지하는데 돈을 쏟아부어 엄청난 빚을 진 보바리 부인은 결국 파산하고, 비소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남겨진 샤를은 결국 병에 걸려 죽는다. 불쌍한 샤를!


 얼마나 허무하고 허황된 삶인가?

읽는 내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면 정말 큰일 날 텐데’라고 되뇌게 된다.

현재의 감사함을 망각하는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그럴듯한 사랑을 꿈꿨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가족을 등진 불안함과 알 길 없는 고민은 계속 그녀를 불행과 후회에 남아있게 할 것이다.

 반면, 샤를은 무슨 죄인가?

아내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 불행한 남자다. 그는 진정 엠마를 사랑했다.

‘그는 만약 진정으로 한결같이 갈망한다면 엠마를 소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그녀의 시체 쪽으로 몸을 굽히고 “엠마! 엠마!” 하고 나지막하게 불러 보기도 했다.’

‘샤를은 괴로운 가슴을 부풀게 하는 막막한 사랑의 충동에 사로잡힌 청년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중략)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길고 까만 머리카락 한 묶음을 손에 쥐고 있었다. (중략) 그는 죽어 있었다.’




 보바리 부인이 저질렀던 것은 그냥 불륜이다. 로맨스나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작가인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보바리 부인을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여인으로 봐주어야 했던 것일까?

인간의 유약함에 초점을 맞춰야만 했을까? 그녀의 타락한 생활에 이유를 찾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변호해야만 했을까?

 쉽지가 않다. 쉽지가 않은 이유는 나와 보바리 부인의 성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바리 부인을 탓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자만할 수 있겠는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지금의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시시각각 변덕인 나 자신을 보면서 내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세상은 우리가 예측한 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누가 누구를 탓할 순 없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다.

책을 마무리하면서 배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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