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소심한 남자 쪽 사랑이야기

<건축학 개론>,<500일의 썸머>, <봄날은 간다>

by 아무거나

영화와 TV 드라마의 멜로드라마들이 여자들을 위한 장르라는 건 오해다. 나는 다양한 종류의 영화를 보는 편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장르를 말하라면 멜로드라마다. 나만 특이한 건가 싶었지만, 주위에 이야기를 해보면 꽤 많은 남자들이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나를 포함한 이런 남성들의 다른 공통분모가 있다면, 대부분 윤종신의 노래와 그가 쓴 가사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착하지만 찌질하고 그래서 못난 윤종신 가사 속 남자들은 이별 앞에 전전긍긍하고, 이별 후에는 절절히 그리워한다. 냉정히 보자면 "혼자 드라마 쓰면서, 그 속에 남주가 된 것 마냥" 감상에 젖는다. 개인적으로 멜로드라마의 명작으로 뽑는 영화 세 편이 있다. 세 편 모두 결국은 남자 쪽 사랑이야기다.


<건축학 개론, 2012>

13_35_27__4f68090fd6c1f[W578-].jpg 출처: http://m.cine21.com/news/view/?mag_id=69369

납득이와 함께 흥행에 성공했던 <건축학 개론>은 한 90년대 학번 남성의 연애 실패담이다. 남자들이 승민(이재훈)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건, 좋아했던 여성 앞에서 용기 낼 수 없었던 과거 언젠가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소심한 남자들의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에 전형 같은 이야기지만 볼 때마다 풋풋하다. 서사는 오롯이 승민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승민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서연은 미스터리 같은 존재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지만 너무 조심스러워 물어볼 염두도 안 나고 그렇다고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도 모른다. 혼자 애쓰다 지친 승민은 서연을 "ㅆ년"이라고 정의한 후 자신의 감정을 묻어둔다. 이 이야기를 지켜보는 납득이(조정석)와 남자들은 이런 승민의 행동 하나하나가 답답하다. 하지만 나 같은 소심한 남성들은 어렸을 때 승민 같은 시절의 기억에 너무 뭐라 할 수도 없다. 그나마 승민(이재훈)은 잘생기기라도 했지.


농담 반이지만 건축학 개론이 남자가 하는 이야기라는 건 자명해 보인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수업에 갑자기 수지가 들어오더니, 자기한테 말을 걸며 친하게 지내지고 한다. 그래서 같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이어폰을 나눠 끼며 전람회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첫눈이 오면 둘만의 장소에서 만나자고 한다. 하지만 상처를 받고 결국 자격지심에 "이제 좀 꺼져 줄래?"라고 일방적으로 수지한테 이별을 고한다. 한참 뒤 수지가 좀 더 어른이 돼어 자신을 찾아오는데, 자세히 보니 한가인이었다. 나에게 흑심이 있어 찾아온 건 분명하지만, 자신에겐 예쁘고 착한 약혼자인 고준희가 있다. 나중에 한가인은 내가 첫사랑이었다면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쓰고 나니 확실히 남성들의 판타지다.


<500일의 썸머, 2009>

5b6a72012000004200349d4c.jpeg?ops=scalefit_630_noupscale 출처: https://img.huffingtonpost.com/asset/5b6a72012000004200349d4c.jpeg?ops=scalefit_630_noupscale

톰(조셉 고든 레빗)은 자신의 연애를 비웃으면서도 같이 고민해주는 친한 친구들과 같이 있다. 톰은 그날 썸머(주이 디샤넬)에게 차이고 화가 나 그릇을 깨고 있다. 친구들은 급히 현명한 톰의 10대 여동생(클로이 모레츠)에게 톰을 상담해달라고 도움 요청을 한다.


톰의 입장에서 썸머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자신의 회사로 입사한 어여쁜 썸머는 사랑 같은 거 안 믿는다면서도 “(다 알면서) 너 나 좋아하냐?”라고 자신에게 물어본다. 머뭇거리는 순간에 집에 가버린 썸머는 다음날 회사 카피룸에서 갑자기 톰한테 와서 진한 키스를 하고 복사물을 가져간다. 둘은 데이트를 시작한다. IKEA에서 신혼부부처럼 같이 침대에 눕기도 하고, 급기야는 포르노 비디오를 같이 보면서 재연하는 단계까지 오지만 그럼에도 우리 관계가 뭐냐고 묻는 톰에게 그런 걸 꼭 정의해야 하냐면서 친구인 이 상태가 좋다고 한다. 이별할 때 넋이 나간 톰을 보고 그녀는 "아직 그래도 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란 말이야"라는 말을 한다. 더 황당한 건 한참 뒤의 상황. 같은 결혼식에 가는 기차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하면서 썸머가 톰에게 다가온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썸머는 나중에 있을 자신의 파티에 톰을 초대를 한다. 둘은 결혼식에서 같이 춤을 추고, 썸머는 돌아오는 기차에서 톰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잔다. 그런데 설렘을 안고 간 썸머의 파티에서 그녀가 약혼 반지를 끼고 있음을 발견한다. 톰은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다. 나중에 공원에서 만난 둘. 톰이 “사랑 같은 거 안 믿는 다던 네가 결혼까지 하다니”라고 말하자 썸머는 “그 남자에게서 너에게서 절대 확신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느꼈다” 라며 톰의 가슴에 스크래치를 낸다. 확실한 상처지만 그의 마음 정리를 더 확실히 도와준다.


이 영화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봤지만 계속 톰의 입장에서 공감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보았을 때 썸머가 자신을 좋아하는 톰에게 몇 번이고 "그냥 이런 캐주얼한 관계로 지내는 것 괜찮지?"라고 확인하면서 선을 긋는 장면들을 발견했다. 그건 썸머가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받아들일 수 있냐고 재차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톰은 (그리고 나는) 썸머를 잃기 싫어서인지 애써 그 질문들을 무시하거나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남성이 그리는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은 썸머의 파티 속에서 직설적인 분할 화면으로 드러난다.


<500일의 썸머>는 연애 영화로서도 훌륭하지만 음악이 좋고, LA의 시내 풍경이 잘 나타난 영화다. 그리고 비선형적인 시간으로 구성한 이 영화의 흐름은 이야기를 돋보이게 한다.


<봄날은 간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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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의 초기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는 한국 멜로드라마 중 가장 뛰어난 두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봄날은 간다>에 농담 섞인 부제를 붙인다면 <상우는 어떻게 은수의 라면이 되었는가?> 정도이지 않을까? (연애 후반기에 접어들어 빨리 와서 라면이나 끓이라던 은수의 말에 상우는 "내가 라면이냐?"며 버럭 화를 낸다). 사실 처음 만날 때 풍기는 포스부터 은수(이영애)는 상우(유지태)를 압도했다. 세련된 빨간 목도리를 하고 있고 나이도 많아 보이고. 예쁜 은수에게 상우는 한 없이 빠져들고 은수도 그런 키 크고 순박한 상우가 싫지 않다. 둘이 연애를 시작하게 계기도 은수가 자기 집에 들어가 "라면을 먹자"라고 제안해 주었기 때문이다. 둘은 은수의 리드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같다. 하지만 ”자고 갈래요? ”,”그건 좀 더 친해지면 해요”,“오늘 같이 있을까?”, “좀 헤어져 있자”라고 능수능란하고 효율적인 연애 언어를 사용하는 은수에게 상우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속만 끙끙 앓는다. 점점 둘의 성격 차이가 드러나게 되자 은수는 이별을 고하고 선글라스를 쓴 느끼한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다. 찌질함을 채 버리지 못한 상우는 은수의 초록색 마티즈를 자기 차 키로 긁다가 은수에게 들키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이 영화를 어려서 보았을 때 난 은수의 변심이 괘씸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하는 상우는 순수하고 멋진 남자였다. 그런데 노희경 작가는 <봄날은 간다>에 대한 어떤 글에서 바로 그런 순수함이 은수 같은 여자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아냐고 일갈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랑의 어떻게 변하니?"라는 상우의 대사는, 어렸을 때 연애 감정은 저렇게 순진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한다는 면에서, 그러니깐 20년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명대사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한석규),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모두 흘러가는 시간 속의 한 순간을 사진으로, 혹은 녹음 소리로 붙잡아 두는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인생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정원과 달리 상우는 은수에게 끝까지 집착 했었다. 영화 마지막, 어느 봄날의 벚꽃길에 가서야 자신을 다잡고 은수를 자신의 마음에서 흘려보낸다.

a3228d031d6f572b4f75781490dcde6c.png 출처: https://extmovie.maxmovie.com/xe/files/attach/images/135/023/267/032/a3228d031d6f572b4f75781490d

세 편 모두 개인적으로 소중한 영화들이다. 장기하는 어떤 인터뷰에서 "(연인 관계에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을 자꾸 해주려고 해서 서로 지치게 되는게 아닐까."고 말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연애에 서툰 남자들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정확히 뭔지 모르고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주려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대게 실패한다.


소심한 남자들의 연애담과 반대로 능글맞은 남자들의 연애 모습을 보고 싶다면, 홍상수의 영화들을 권하고 싶다. 여자들의 언어가 좀 더 들어간 멜로드라마는 아마도 <연애의 온도>, <연애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그리고 정가영 감독의 영화들 정도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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