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단어는 나에게 참 크고 멀게 느껴진다. 괜히 뽐내는 느낌이 들어서, 이 단어를 언급할 때면 부끄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내가 창조해 나갈 ‘예술’을 정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삶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자궁 같은 예술을 한다.
의도적으로 ‘하고 싶다’나 ‘할 것이다’ 같은 동사 어미를 쓰지 않았다. 내가 의식하기도 전부터 이미 이 방향성을 갖고 글을 쓰고 노래를 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창작활동을 하기 전부터, 창작의 씨앗만을 심고 있을 때부터 나는 엄마의 자궁 같은 예술을 지향해 왔다.
나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물론 개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 존재만으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존재만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존재’를 딱 떨어지게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수많은 요소들의 총체인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존재’이고 또 ‘조건’인지 스스로조차 쉬이 판단할 수 없다. 외적 조건을 다 빼버린다면 그럼 우리는 뇌라는 장기만 사랑해야 하나? 심장만 사랑해야 하나? 부와 학벌도 한 사람의 성격과 노력에 의해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걸 어떻게 분리해서 바라봐야 하나?
존재만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사실 거의 모든 인간들은 존재만으로 사랑받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바로 엄마의 뱃속에 있었을 때다. 성별도 외모도 성격도 모르고, 이 아이가 나중에 말을 잘 들을지 사고를 칠지도 모르고,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도 전혀 모르지만, 부모는 그 아이를 존재만으로 사랑한다. 존재만으로 귀히 여긴다.
나는 우리 모두 그렇게 존재만으로 사랑받았던 기억이 우리 마음 어딘가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려 우리 자아의 근원이 되었다고 믿는다. 태아 때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으니 우리가 지금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순 없지만, 그 느낌만은 무의식 속에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 경험했으니 사라졌을 리가 없다.
물론 내 노래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유독 마음이 가는 노래들이 있다. ‘사랑 노래’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은 진정한 사랑을 말하는 노래들! 이 노래들을 듣는 이들이 나 자신이 존재만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그 알 수 없는 몽글몽글한 따스함과 안전함을 느낄 수 있길 소망한다.
나 자신을 지켜주었던 노래들이 부디 다른 이들도 지켜줄 수 있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