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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May 08. 2019

감정 투성이 중년 남자들

40대 남자들의 지금 II

사람이 병을 앓거나 죽음에 이르는 것은 몸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정신, 마음의 상태에 따라 몸도 영향을 받는다. 남자가 40대에 들면서 갑자기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몸과 마음이 전에 없이 허약해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스스로 치료할 수 없는 수준의 상처를 받거나 그 상처들이 낫지 않은 채 또 다른 상처들이 늘어나기만 한다면 상처들은 곪고 썩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처들이 삶에 제대로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때가 남자에게는 40대인 것이다. 다행히 아직은 체력도 괜찮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편에 속한다. 경험도 어느 정도 쌓였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지속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미 속으로는 골병이 들었거나, 골병이 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관리를 잘만 하면 몸의 병은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 생긴 상처들은 고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아파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40대가 되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리타분한 세대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고 항변하지만 한창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40대 남자는 이미 늙은, 또는 늙어가는 세대다. ‘꼰대’ 소리 안 듣는 게 어디냐며 ‘쿨’한 아저씨 시늉을 해보지만 젊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니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게다가 그들은 노인도, 젊은이도 아닌 중년 남자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나마 아직은 젊은 나이임을 인정해주는 50대, 60대 사이에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내 ‘같이 늙어가는 처지’ 임을 실감하면 청춘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침울해진다.


가정에서는 가족 구성원으로의 자격보다는 생활을 책임지는 역할만이 강조된다. 직장에서는 아랫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윗사람의 심기를 헤아리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친구나 지인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날까 불편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는 자신이 한없이 나약해 보인다.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더 보여줄 것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점점 커진다. 그동안 유치하다고 여겼던 외로움, 열등감, 질투, 분노, 불안 같은 감정들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도 인식한다. 하지만 나의 그런 감정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금방 알게 된다. 세상은 40대 남자의 감정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사람들은 이런 40대 남자들의 모습을 '갱년기', '사추기', '사십춘기' 정도로 얘기한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감소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상대적인 증가에서 40대 남자의 당혹스러운 우울과 때아닌 눈물 바람의 이유를 찾는다. “40대가 되면 원래 그렇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빗대어 남자다움이라는 틀 안에 그대로 머물기를 강요한다. 그 틀 안에서 40대 남자는 여전히 담대하고 점잖고 어른스럽고 남자다워야 한다. 눈물과 우울함 같은 감정은 호르몬 탓으로 돌려 40대 남자의 구성물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지독하게 이성적이고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40대 남자의 감정과 그 감정들을 담아둔 마음은 철저히 무시된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호르몬으로 작용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감정은 외부의 자극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우울함과 슬픔 같은 감정도 그런 반응을 촉발한 자극 때문에 생겨난다. 자신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타자로 인해 삶의 의미가 규정되는 일은 우울함을, 세상과 관계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은 소외감을 이끌어 낸다. 다른 감정들도 다르지 않다. 40대 남자는 감정을 촉발한 자극을 애써 무시하거나 감정을 오해 또는 착각한 덕분에 감정 앞에 흔들리지 않는 남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을 뿐이다. 남자의 40대는 그렇게 억눌리고 재단당했던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때다. 마음의 빗장은 두 개다. 빗장 하나는 앞에서 말한 호르몬이다. 감정이 마음의 문제이긴 하지만 생리적인 면을 아예 부정할 수는 없다. 남성 호르몬이 줄고 여성 호르몬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면 신체적인 남성다움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남성성까지 줄어들게 된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다른 빗장은 일종의 깨달음이다. 40대가 되면 더 이상 자신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대나 30대 남자들은 상황이 좀 구질구질하고 힘들어도 어느 정도 자신감은 있다. 그 자신감 덕에 더 나은 미래, 너 나은 자신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간다. 남자답게 말이다. 하지만 40대가 되면 장밋빛 내일이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성공은 정말 드물고 얻기 힘들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40년을 넘도록 '남자답게' 살아왔지만 삶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장밋빛 미래를 만들 만큼 자신이 유능하거나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어른스럽지 못함을, 유치함을 알게 되었으니 남성성을 과시할 필요와 이유를 이전처럼 굳건하게 유지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호르몬까지 가세하니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것을 막기가 힘들다. 그나마 몸에 배어 있는 남자다움 때문에 마음의 문이 한순간에 활짝 열리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락거릴만한 제법 큰 틈이 생기는 것은 막을 길이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음의 문틈으로 감정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당사자는 이런 마음의 반응에 낯설고 어색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다. 40대 남자는 아직 활기가 넘치고 힘이 왕성해야 하며, 주변을 포함한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이기 전에, 40대이기 전에 사람이다. 사람은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고 한번 생긴 감정은 쉽사리 가시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40대 남자들을 남자다움의 틀 속에 넣고 싶어 하지만 빗장이 열려버린 40대 남자의 마음은 이미 감정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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