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 II
감정에 관한 논의와 사유는 수 천년 전부터 있어왔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는 현대와 비교해서 문명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축적한 지식과 기술의 수준도 보잘것없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근원적이고 완전한 것을 상정해서 세상을 읽어내야만 했다. 플라톤(Plato)의 경우 사물의 본질을 ‘이데아(idea)’라고 하였으며 이 이데아와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체를 영혼으로 규정했다. 플라톤은 영혼이 이성, 감정, 욕구라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성으로 욕구와 감정을 극복해야 비로소 이데아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 이야기로 감정과 욕구를 통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인간의 영혼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이며 마차를 모는 마부는 이성이다.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 중에서 한 마리는 혈통도 좋고 명령을 잘 따르지만 다른 한 마리는 혈통이 좋지 않고 제멋대로이다. 마부가 이 두 마리의 말 중에서 특히 명령을 잘 따르지 않는 혈통이 나쁜 말을 얼마나 잘 조정하느냐에 따라 마차는 뒤집어질 수도 있고 제대로 달릴 수도 있다. 여기서 말을 잘 듣는 말은 용기(기개)를 뜻하며 제멋대로인 말은 감정, 욕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성이 나쁜 욕구와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영혼의 질과 방향성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에로스(Eros)가 필요하다고 했다. 에로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이지만 플라톤은 이 에로스를 이데아에 이르려고 하는 강렬하고 긍정적인 욕구로 상정하였다. 즉, 플라톤은 욕구나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해야 하는 대상인 동시에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이중적 대상으로 인식했다.
플라톤의 스승이던 소크라테스(Socrates) 역시 감정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관통하는 말은 “네 자신을 알라.”이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델포이의 아테나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있던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진정한 앎에 대해 철학하였으며,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앎은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소크라테스 역시 감정을 진정한 앎, 다시 말해 이성적인 깨달음을 위해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셈이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감정을 “우리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판단에 차이를 만들어 내고 고통과 즐거움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에서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를 설득의 세 가지 요소로 들었다. 이 중에 파토스가 감정을 의미하며 로고스는 논리(이성)를, 에토스는 인격(개인의 내면)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잘 조합해야 설득의 효과를 극대화할 있다고 했다. 특히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감정적, 정서적 공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서 파토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감정은 사람을 기만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감정으로 설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성(로고스)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의 효율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활용 범위를 이성의 틀 안으로 한정 짓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헬레니즘을 대표했던 스토아 철학에서 감정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스토아 철학에서 영혼은 이성, 감각, 신체로 구성되며, 감각은 신체의 자극에 의해 발생하는 욕구로 인식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이성(Logos)이야말로 우주의 본성이자 인간의 본성이며, 감정은 그 이성을 벗어나려는 충동적인 움직임이라고 보았다. 스토아 철학은 감정, 다시 말해 이성을 벗어나려는 충동을 지혜와 이성으로 절제하면 금욕과 평정 상태인 아파테이아(Apateia)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흔히 스토아 철학을 ‘금욕주의’로 정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이한 것은 스토아 철학은 감정을 자극에 대한 정신의 반응이면서 동시에 자극에 대한 판단과 추론의 결과로 보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의도와는 상관없이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판단에 의해 선택된 감정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2000년이 훨씬 지난 현대에 와서 감정을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판단)의 결과로 보는 경향을 있음을 생각하면 감정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분석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사유는 근대에 이르러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로 유명한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정념론』을 통해 감정에 대한 근대적 시각을 제시했다. 데카르트의 출발점은 육체와 영혼이 별개로 나누어져 있다는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었다. 데카르트는 감정이란 육체와 영혼이 공통적으로 갖는 자극이며 “삶의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오직 정념에 의존한다”라고 정의했다. 감정을 오직 극복과 절제의 대상으로 여겼던 2000년 전에 비하면 감정의 위상을 어느 정도 격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정의에 따르면 경이로움, 사랑, 미움, 욕망, 기쁨, 슬픔의 여섯 가지가 기본적인 감정이며 그 외의 감정들은 이 기본 감정들로부터 파생되거나 조합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감정은 의지로 통제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하던 이성우위론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감정에 대한 오래된 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인다.
한편,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이성이 감정의 통제 수단이라든가, 감정이 이성에 앞선다든가 하는 우월의 개념을 뛰어넘었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자연(신神) 그 차체로 보았으며 감정 역시 그 범주에 들어가 있는 개념으로 여겼다. 스피노자는 이성과 감정 사이의 우월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의지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의견에 반대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감정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인 ‘코나투스(conatus)’의 일부이자 에너지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쁜 감정들과 수동적 감정들 대신 기쁜 감정과 능동적 감정을 일으켜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장이었다. 스피노자는 감정의 원인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감정과 대립되는 더 강한 감정을 통해 감정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더 강한 감정’은 존재 스스로가 찾아낸 ‘능동적 감정’이며 이는 곧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인 코나투스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기쁨, 슬픔, 욕망에서 인간의 모든 감정이 나오며, 기쁨을 가까이하고 슬픔을 멀리하는 능동적 태도를 통해 행복(자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감정을 대하는 스피노자의 관점이었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인간의 한 단면으로 보았을 뿐, 이성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거나 이성을 인간의 주체로 보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감정에 대한 보편적 시각의 전복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세상을 중심으로 둔다는 점에서 의미가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감정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언했다. 흄은 『인성론』 에서 이성이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오래된 프레임을 반박했다. 흄은 감정이 실재적인 반면에 이성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감정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성은 행위나 욕구를 일으킬 수 없고, 더 나아가서 감정이 행위와 욕구를 일으키는 것을 이성이 막을 수 없다고 흄은 주장한다. 흄은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는 결코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한다거나 이성이 감정에 따라야 한다는 고전적인 개념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명확하게 짚어내고자 했던 이러한 시도 덕분에 흄의 철학은 인간 자체를 중심에 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흄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책 『도덕감정론』에서 도덕의 기준을 감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성을 도덕의 기준으로 보던 전통적인 시각을 근본적으로 반박하는 주장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인 ‘공감(sympathy)’을 도덕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인간은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있고 이기심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孟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리게 하는 아담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데이비드 흄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흄은 행위의 동기는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갖고 있는 내적 도덕감이라고 했으며, 아담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그 도덕감의 원리를 공감에서 찾았다. 많은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를 『국부론』의 저자이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으로 시장의 자기 통제 능력을 강조한 경제학의 아버지로 알고 있다. 하지만 『국부론』에는 '경제학/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으며, 아담 스미스 본인은 자신을 도덕철학자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