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 II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학문 초기에 스피노자를 자신의 선구자로 삼았다. 감정이 이성으로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일부이자 그 자체라고 본 스피노자의 감정에 관한 시각이 니체를 매혹했던 것이다. 니체는 1878년에 출판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인간은 행동을 약속할 수는 있지만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이 말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데이비드 흄의 말과 맥이 닿는다. 이렇게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했던 니체 역시 이성, 본능, 감각, 충동 등과 함께 감정을 ‘의지’의 일부로 여기는 선에서 매듭을 짓고 만다. 그나마 이전 철학들이 보여주었던 이성 우월주의에 비해 감정을 이성이나 의지와 동일한 수준으로 평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한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교육에 관해 쓴 그의 책 『에밀』에서 감정을 자기 보존의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정념, 그것이야말로 자기 보존의 수단이다.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을 없애려 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는 것이며 신의 의지를 배반하는 것이다.” 루소가 스피노자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감정에 대한 루소의 개념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매우 유사한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루소는 자연주의 교육론 펼쳤던 사람답게 있는 그대로의 인간, 나아가서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흔히 장 자크 루소를 계몽주의 사상가라고 하지만 자연주의적 성향, 이성과 감성의 조화 같은 부분에서 일반적인 계몽주의자들과 사상체계의 차이가 있다.
근대 철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영혼의 병’이라고 했다. 칸트는 감정을 배타적이며, 무질서하고, 이성보다 저급하며,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근대 서양 철학의 주류였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넘어서는 철학적 업적을 쌓았지만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된 감정에 대한 전통적 프레임은 거부하지 않은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칸트가 데이비드 흄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본질에 관해서는 흄과 반대되는 입장을 폈다는 사실이다. 칸트 철학 해석으로 유명한 독일의 현대 철학자 프리드리히 카울 바흐(Friedrich Kaulbach)의 ‘이성이 무엇인지 보이려고 자연은 칸트를 낳았다’라는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칸트 역시 이성이 감성의 우위에 있고,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한편 동양철학에서 감정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로 대표되었다. 희로애락은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뜻하는 말로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자(子思子)가 쓴 『중용(中庸)』에 등장한다. 이 책에는 칠정(七情)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 말은 일곱 가지의 감정을 의미한다. 일곱 가지 감정은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懼, 구), 사랑(愛, 애), 미움(惡, 오), 욕망(欲, 욕)이다.
공자와 함께 유교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맹자(孟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도덕적 감정인 사단(四端)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사단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옳지 못한 행동을 싫어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가리킨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에 이러한 윤리적 본성이 있다고 했다. 이후 중국 송나라, 명나라를 거치며 성립된 성리학에서 맹자가 말한 사단이 중요시되면서 그것과 대립되는 개념인 칠정도 다시 한번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사단과 칠정을 묶어 ‘사단칠정’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6세기 조선시대에 퇴계 이황과 기대승이 사단칠정을 두고 논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를 사칠논변(四七論辯)이라고 하며 이후 200여 년 동안 이어지며 동인과 서인이 나누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종합적이고 인식론적인 서구의 철학과 달리 동양의 철학은 윤리적 측면이 강했다. 그래서 감정에 대한 접근도 분석적이기보다는 실천 윤리의 측면에서 해석되었다. 『중용』에는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中)와 희로애락이 드러나지만 그 정도가 알맞은 경우(和)가 합쳐지면 세상 만물이 조화롭다는 내용이 나온다. 맹자 역시 사단을 제시하며 감정이 도덕성의 근본을 이룬다고 보았다. 즉, 동양철학에서 감정은 세상의 조화를 이루는 도덕과 윤리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감정은 종래의 관념적 고찰이 아닌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심리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행위와 동기와 감정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정서심리학(Psychology of emotion)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이 중에서 제임스-랑게 이론(James-Lange Theory)이 대표적이다. 빌헬름 분트(Wilhelm Max Wundt)와 함께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신체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에 따라서 감정이 일어난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감정은 신체 상태나 신체의 변화를 뇌가 해석한 결과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덴마크의 심리학자인 칼 랑게(Carl Lange) 역시 윌리엄 제임스와 같은 주장을 폈으며 이 두 사람의 이론 ‘제임스-랑게 이론’이라고 불리며 정서심리학에서 대표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감정을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근원이 되는 힘으로 해석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필요한데, 행위의 구체적인 목적과 형식을 동기가 규정하고, 실질적인 행위의 뒷받침이 되는 정신적인 힘이 감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데이비드 흄과 비슷하게 이성적인 동기가 충동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생리학이나 뇌과학, 신경학 등의 분야에서 감정에 대한 좀 더 계량적이고 물리적인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 350여 년 전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심신이원론을 바탕으로 정념(감정)을 논할 때와는 분위기가 무척 다르다. 인간의 뇌나 신경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정신’, ‘마음’, ‘영혼’은 뇌의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작동의 산물, 혹은 뇌 속에 있는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상관 작용에 의해 조정되는 ‘상태’ 일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성과 감정은 경계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둘 사이의 우열을 쉽게 매길 수도 없다. 한때 뇌의 변연계가 감정이나 본능 같은 부분을 담당하고 인간이 진화하면서 나중에 생겨난 신피질이 기억이나 논리적 사고를 담당한다는 가설이 있었다. 이 가설대로라면 신피질의 역할이 변연계의 역할보다 더 고등하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변연계가 학습이나 기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뇌의 영역에 따른 기능의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었다.
과학 분야에서만 감정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감정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은 감정의 고전적인 해석을 흔들고 있다. 노스이스턴 대학의 심리학 교수이자 인지학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감정이 자극에 대한 의도되지 않은 반응이 아니라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 사물에 대한 해석을 통해 구성한 감각에 부여된 의미’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배럿이 ‘구성된 감정 이론’이라고 부르는 이 주장을 풀어서 말하면, 어떤 자극이 들어왔을 때 뇌는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감각의 의미를 부여하여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감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능동적으로 구성한다는 뜻이 된다. 이는 지난 수 천년 동안 통제의 대상으로 취급되었던 감정의 입장에서는 무척 고무적인 시각이다.
이렇듯 인류는 수천 년 동안 감정을 알기 위해 노력해 왔고 감정에 관한 수많은 명제를 제시했다. 하지만 그 어떤 명제도 진리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감정에 관한 숱한 명제들 중에서 여전히 유효한 명제가 있다면 우리가 아직 감정에 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일 것이다. 감정이라는 해묵은 관념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지금도 맹렬하게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