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남자의 감정 Chapter 1 불안
불안은 달갑지 않거나 불쾌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거나 기대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영어로는 anxiety이며, 이 단어는 불안, 방해, 우려를 뜻하는 라틴어 anxius에서 나왔다. 불안은 공포와 함께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한 갈래이다. 두려움은 대상이 실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경우에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반면에 두려움의 대상이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있을 경우에 느끼는 감정은 불안이다. 예를 들어 놀이공원에 있는 유령의 집에 들어가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을 때면 무엇이 나타나지나 않을까 싶어 조마조마해진다. 무엇이 나올지 몰라서 두려운 감정이 불안이다. 발걸음을 옮겨 붉은 색 조명이 깔린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천정에서 귀신 마네킹이 뚝 떨어지면 혼비백산한다. 이 때 느끼는 감정이 공포다.
불안은 안전이나 생존이 위협받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안에 빠지면 신체적인 변화가 두드러진다. 심장 박동이 증가하고 호흡이 빨라진다. 몸이 떨리고 땀을 흘리기도 하며 근육은 긴장한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몸이 준비를 하는 것이다. 불안은 그 자체로는 불쾌한 감정이지만 닥쳐올 상황에 대해 준비를 하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불안의 정도가 지나치거나 비정상적인 불안은 공황장애, 강박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의 질병을 불러오기도 한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실존주의 철학의 중심을 이룬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개념을 내세운 실존주의는 20세기 철학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19세기 중반에 살았던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에서 실존주의 철학의 기원을 찾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으로서 실존의 문제는 불안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는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불안이 절망을 낳고,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불안은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절망은 죽음이라는 마지막 희망까지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희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으며 불안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거나 불안을 망각한 채 불안에 안주하게 되면 절망에 빠진다는 것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불안과 절망의 관계다.
한편,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이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라고도 했다. 비록 삶에서 불안을 떨구어 낼 수는 없지만 그 불안은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생겼으므로 선택의 자유는 유효하다는 의미다. 선택할 자유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유에서든 정해진 단 한 사람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면,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될지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수십 년 전, 한 명의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100%의 득표율로 대통령을 뽑던 시절에 투표권을 가졌던 사람들은 기표를 잘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안해했을 지는 몰라도 원하지 않는 대통령이 뽑히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택할 자유가 늘어날수록 더 불안해지는 일종의 ‘자유의 역설’이다. 끊임 없는 선택의 결과로 우리의 삶이 이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사람은 죽는 그 순간까지 불안에 떨어야 한다. 심지어 불안의 끝인 죽음조차도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불안의 원인이 된다.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시작한 불안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근대 사상이 무너지고 1차 세계대전과 사회주의 혁명 등으로 ‘불안’이 가중되던 시기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의해 철학적 의미를 부여 받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 불안에 근본을 두고 있으며, 그 불안은 인간의 유한성, 즉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인간의 불안에 기반한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시몬느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폴 틸리히(Paul Tillich) 등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 문학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적절하게 방출되지 못한 리비도(성적 충동)와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인해 불안이 생긴다고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공포는 대상이 있으며 불안은 대상이 없다고 구분했다. 이와 달리 프로이트의 제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불안도 대상이 없지는 않으며, 단지 그 대상이 상징화 되지 않는 욕망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의 제자이면서 그의 이론에 반기를 들며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열등감과 인정욕구를 불안의 원인으로 보았다. 특히 사회적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인정받지 못한 경우 불안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스위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좀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보통이 말하는 불안은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불안이다. 자본과 물질의 지배를 받는 현대 사회에서 ‘지위’는 사랑과 신뢰를 얼마나 얻을 지를 결정하는 요소다. 사람들은 더 사랑 받기 위해, 사랑 받을 자격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노심초사 한다. 결국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자신이 아는 사람의 성공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자신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뒤처질까 불안해 한다는 것이 보통이 보는 ‘현대적 불안’이다.
스피노자는 두려움을 ‘의심스러운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불안정한 슬픔(의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스피노자의 두려움은 눈 앞에 있는 명확한 대상이 아니라 ‘아직은 의심이라는 상상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불안과 맥을 같이 한다. 스피노자가 두려움을 ‘불안정한 슬픔’이라고 한 이유는 두려움이 희망을 동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거부하고 싶거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면 분명 두렵고 불안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희망과 불안(두려움)이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두려움을 ‘불안정한 슬픔’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라는 말과 그 맥락이 비슷하다.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의 불안에 대한 정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정의했다. 데카르트는 두려움을 ‘바라는 것이 오지 않는다고 믿는 마음’이라고 했다. 데카르트의 정의도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상상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대상이 존재하는 공포보다는 불안에 가깝다. 데카르트도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희망은 동시에 품을 수 있다고 했다. 또,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두려움은 미래의 결과를 무서워하는 데에서 생기므로 결과에 대해 각오하는 것이 두려움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스피노자와 데카르트가 말하는 두려움은 불안에 가깝다.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두 사람의 정의는 하나의 공통점을 갖는다. 두려움 안에는 희망의 가능성과 절망의 슬픔이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 결과가 괴로움이나 고통일 것이라는 예감(절망감)이 클수록 두려움(불안)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결국, 불안의 감정은 상상했던 희망이나 절망이 달성되는 순간 사라진다.
문명을 이루기 전에 살았던 ‘처음의 인간’들은 자연이 주는 위험과 굶주림, 죽음과 같은 ‘원초적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 사회를 만들고 규칙과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면서는 인간들은 먼 옛날 조상들이 느꼈던 원초적 불안으로부터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사회의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문명이 더욱 발달해서 평균적인 삶의 질이 나아질수록 생존에 대한 불안은 삶에 영향을 덜 주게 되었다. 그것을 원초적 불안을 과거의 불안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과거의 불안이 삶을 잠식할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는다. 과거의 불안을 느낄만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는 수 천년, 수 만년 전보다 확실히 덜하다. 지금은 맹수에게 공격 당하거나,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추위나 더위에 쓰러질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사람들은 수 만년을 살아오면서 그런 불안의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으며 많은 부분 성과를 보았다. 덕분에 현대의 사람들은 먼 옛날 사람들이 가졌던 불안으로부터 여유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원초적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명은 태고와는 다른 모습으로 원초적 불안을 자극한다. 범죄, 교통사고, 질병, 전쟁 같은 문명의 산물들은 그 옛날 인류의 조상이 가졌던 원초적 불안의 원인을 대체했다. 결국 원인이 바뀌었을 뿐, 인간에게 원초적 불안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갖고 살며 그 불안은 인간이 삶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지니는 것이다.
어쩌면 그 옛날 처음의 인간으로 살았던 그들보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불안할 지도 모른다. 인류의 조상들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가졌던 원초적인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우리의 세포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것에 더해 사회가 거대해지고 문명을 갖추면서 인류는 죽음의 공포 이외의 다른 불안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선택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불안도 더 많이 늘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여러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 시스템들이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현대의 불안은 과거의 불안 보다 훨씬 세밀하고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