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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May 17. 2019

사오정과 오륙도의 불안

고용불안 - 세상은 넓고 내가 할 일은 적다 

초등학교(40대에게는 ‘국민학교’) 시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른이 되면 마음껏 콜라를 사 먹어야지!” 열두 살 5학년다운 소박한 소원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직장을 갖고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갈래를 더 뻗어 나가서 나의 아버지처럼 직장을 다니고 월급을 받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라는 데까지 닿았다. 무언가 막막하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 나의 집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부모님들께서 모두 일을 하셨지만 쪼들릴 때가 더 많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으니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겁이 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싶다. 


다행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나 역시 인간인 덕분에 나이가 들면서 그때의 기억은 옅어졌다. 남들처럼 학교 다니고, 취직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렇게 무심히 살아오다 그때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되니 어릴 적 잠시 느꼈던 불안감이 가끔씩 떠오른다. 묘하게도 열두 살에 지나치듯 느꼈던 그 불안과 지금의 불안은 거의 같다. 나는 지금 얼마나 일을 더 할 수 있을지, 아이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지 불안하다. 아마 나의 아버지도 그런 불안을 안은 채 남편, 아버지, 가장으로 살아왔으리라. 그때는 몰랐지만 열두 살의 나는 본의 아니게 아버지와 같은 종류의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딱히 철이 들었던 것도 아니고, 핏줄이나 유전자의 공유 차원에서 내 아버지를 공감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의 지위와 그 지위에 부과되는 역할과 책임이 일으키는 감정을 어쩌다 엿보게 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스치듯 보았던 감정은 지금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었다.


40대는 20대나 30대에 비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운이 제대로 따라줘야 10~15년 정도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45세가 사실상 정년이라는 뜻으로 ‘사오정’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졌고 은퇴 시기도 빨라졌다. ‘쉰여섯 먹은 직장인은 도둑’이라는 뜻인 ‘오륙도’까지는 갈 것 없다. 그나마 40대 초반은 10년 정도는 더 일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지만 곧 쉰이 되는 40대 후반은 일할 시간이 이제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기대 수명도 늘어나고 건강 상태도 더 좋아졌는데 은퇴해야 하는 시기는 오히려 옛날보다 더 빨라졌다. 다른 곳은 몰라도 직업전선에서만큼은 일찍 늙어버리는 셈이다. 오죽하면 강준만 교수가 ‘우리 사회는 조로(早老)를 강요한다’는 말까지 했을까.


돈을 버는 것이 아버지 역할의 전부는 아니다. 어머니가, 혹은 자식이 대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아버지에게는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아버지’라는 말에는 이미 그러한 가부장적 프레임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머니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면, 설사 그 아버지가 살림을 도맡아서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고 해도 ‘집에서 논다’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돈벌이, 살림, 육아의 경계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는 경향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남자인 아버지가 돈을 벌어와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프레임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 프레임에 삶의 유지와 가족에 대한 애정, 자신의 자아존중감(자존감)까지 겹치면서 아버지들은 자신의 고용 상태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게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언제까지나 원하는 만큼 계속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내일 아침부터 당장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은 드물겠지만 몇 개월 후에도 같은 일을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세상이 워낙 복잡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조차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고용상태가 바로 고용 불안의 원인이 된다.


고용불안을 묻는 설문을 보면 설문 문항을 어떻게 짜든 간에 직장인의 상당수가 고용 불안을 느낀다고 답한다.취업포털 잡코리아가 2016년 12월에 정규직 직장인 1,065명을 대상으로 한 고용불안감 현황 조사를 보면, 자그마치 80.2%가 현재의 고용상태에 불안감을 느낀다고 답을 했다. 특히 40대 이상의 경우 불안감을 느낀다는 답변이 89.3%에 이르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6년 한 통계조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 통계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79.4%가 일자리를 잃거나 실업 후에 일자리를 다시 얻지 못하는 것을 불안해하고 있다. 스웨덴이 24%, 미국이 40%인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용에 대한 불안 수준은 OECD 국가 중에서 멕시코에 이어서 두 번째로 높다고 한다. 근래에는 4차 산업혁명이다 인공지능이다 해서 고용에 대한 불안이 더 커지고 있다. 사람과 경쟁하는 것도 모자라 CPU와도 경쟁해야 할 판이니 고용에 대해, 정확하게는 '피고용 상태의 유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그야말로 현실이다.


이 불안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걱정이 아니다. 실제 통계를 보아도 그렇다. 핵심 중산층이라고 얘기하는 전문직, 경영관리직과 기술직의 경우 2001년 당시 30대였던 남성들이 2011년에 기존 수준의 직장을 유지하는 비율은 65.13%라는 통계 조사 결과가 있다. 이 정도면 유지 비율이 꽤나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통계 조사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대상이다. 썩 괜찮은 직업을 가져 중산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 정도인데 그 보다 수가 더 많은, 중소기업이나 소기업에 다니거나 비전문적인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이 더 나을 리는 만무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40대 남자들 눈에는 ‘밀려남’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더구나 그 속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안의 그늘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은퇴를 하고서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다. 1970년대에 태어난 지금의 40대는 시쳇말로 ‘머릿수’가 너무 많다. 지금 40대들의 출생아 수는 매년 80만~100만 정도였고 40대 남자의 수는 450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40대 남자들보다 수가 더 많은 50대 남자들이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다. 지금의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 막상 은퇴를 한다고 해도 자잘한 일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은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은퇴를 하면 원래 하던 일보다 낮은 수준의 일자리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나이가 많다고 밀려난 마당에, 비슷한 수준의 다른 곳에서 쉽게 받아줄 리 없다. 하지만 40대의 경우는 머릿수가 워낙 많고 50대들도 건재하다 보니 낮은 수준의 일자리를 두고서도 경쟁이 너무 세다.  “안되면 아파트 경비원이라도 해야지 뭐.”라고 쉽게 말하지만 경비원 자리라고 남아도는 게 아니다. 인구도 국가 경쟁력이라며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는 시국에서는 '경쟁력'의 주체들이었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의 경쟁으로 허덕거리는 모습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이런 상황에서 10년 남짓한 시간 안에 은퇴가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한 40대 아버지들의 불안은 당연한 감정이다. 어쩌면, 정해진 은퇴라는 '재난에 가까운' 현실 앞에서 불안이 아닌 공포를 느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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